1804년 7월 12일 49세
![]() |
알렉산더 해밀턴 초상화. |
“어떻게 사생아에, 고아에, 매춘부와 스코틀랜드 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영웅이자 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버지도 없으면서 10달러 지폐에 나오는 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은 빠르게 읊는 랩으로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의 삶을 다룬 이 뮤지컬은 2016년 미국 공연계 최고상인 토니상 11관왕에 올랐다.
뮤지컬 '해밀턴' alexander hamilton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다. 카리브해 영국령의 작은 섬 네비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9세때부터 고아로 자랐다. 신산스러운 나날에도 남다른 의지와 능력을 보이며 15세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독립전쟁은 기회였다. 킹스칼리지(현 컬럼비아대)를 중퇴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 휘하에 들어갔다.
미국 건국 후 초대 재무장관이 된 해밀턴은 버지니아 농장주 출신인 워싱턴 대통령과 제퍼슨 국무장관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신생국 미국을 농업 중심 나라로 건설하려 할 때 “미국은 사업 천재들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설득해 사유재산과 특허 보호, 중앙은행 설립 등 미국 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 |
미국 10달러 지폐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이다. |
연방주의자이자 중상주의자인 해밀턴은 반연방주의자이자 중농주의자인 제퍼슨과 늘 대립했다. 타협이 없지 않았다. 제퍼슨 의견대로 수도를 버지니아에 가까운 포토맥 강가인 현재 워싱턴 D.C로 정하는데 동의하는 대신 자신의 중상주의 정책을 관철시켰다.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적인 제퍼슨을 지지해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퍼슨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부통령이 된 애런 버(1756~1836)는 해밀턴을 증오했다. 해밀턴도 버를 신뢰하지 않았다. 해밀턴은 1804년 초 뉴욕주지사 선거에 나온 버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 |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 장면을 그린 삽화. |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미국 3대 부통령과 초대 재무장관이 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둘은 1804년 7월 11일 뉴저지주 위호켄의 한적한 숲에서 마주했다. 당시 뉴욕주에선 결투가 불법이었던 반면 뉴저지주에선 합법이었다. 애런 버가 쏜 총알이 해밀턴의 오른쪽 골반에 맞았고 척추까지 관통했다. 해밀턴은 이튿날인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부조리극 같은 마지막이었다. 애런 버도 승자는 아니었다. 그는 “살인자”라는 비판 여론에 시달리며 부통령직에서 쫓겨났고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다.
200년 후인 2004년 7월 11일 해밀턴과 버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결투 장소인 위호켄에 모여 결투를 재연하고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해밀턴 5대손 더글러스 해밀턴과 버의 사촌의 후손인 안토니오 버는 서로 악수하고 과거를 용서했다.
![]() |
맨해턴 맞은 편 뉴저지 위호켄 해밀턴과 버의 결투 장소는 지금 해밀턴 흉상이 서 있는 해밀턴 공원이 되었다. 조선일보 2020년 11월 10일 A30면. |
기억의 역사에서 승자는 해밀턴이다. 뉴저지주 위호켄의 결투 장소는 지금 해밀턴 공원이 되었다. 맨해튼섬 맞은 편 허드슨강과 뉴욕의 마천루가 바라보이는 언덕이다. 숨진 자리에 해밀턴 흉상이 서 있다.
뮤지컬 ‘해밀턴’이 토니상을 휩쓸었던 시상식 축하 영상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 작품은 미국이라는 기적에 관한 뮤지컬이다. 포용과 다양성, 기회의 땅, 출신이 아무리 초라해도 노력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나라의 이야기”라고 했다. 뮤지컬의 바탕이 된 전기작가 론 처노의 평전 ‘알렉산더 해밀턴’은 2018년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다. 1428쪽에 이르는 두꺼운 분량이다.
[이한수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