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20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부패와 물가폭등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2주간 이어진 시위는 남미 국가에서 20년 만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브라질 전역 80개 도시에서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AFP/연합뉴스 |
2010년 12월17일, 26살 튀니지 청년은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대학을 다녔지만 일자리가 없었고, 채소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무허가라며 단속반에게 저울을 압수당했다.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뒤 청년은 관청 건물에서 분신했다.
청년의 이름은 모하메드 부아지지. 그의 죽음은 이슬람권 민주화 운동을 가리키는 ‘아랍의 봄’ 기폭제가 되었다. 국제 전문기자 빈센트 베빈스가 튀니지 사람들에게 부아지지에 대해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명복을 빌어요. 하지만 다들 그를 싫어해요.” 대규모 시위 이후 튀니지는 독재정치로 회귀했고 정치 상황은 더 나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광장의 역설’(박윤주 옮김, 진실의힘)을 쓴 베빈스는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에서 일한 미국 언론인으로, 2010년대 세계 곳곳의 대규모 시위를 취재했다. 2010년 부아지지의 분신부터 2020년 홍콩 ‘우산운동’까지 10년간의 대규모 저항 운동을 추적하면서 그는 왜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바뀌지 않았는지 질문했다.
광장의 역설 l 빈센트 베빈스 지음, 박윤주 옮김, 진실의힘, 2만7000원 |
2010년대 10년간의 시위는 몇몇 공통점을 지녔다. 자발적이고, 핸드폰으로 디지털 정보를 주고받으며, 위계 없이 수평적이며, 지도자가 없는 대중 시위라는 점이었다. 이런 특성을 저자는 ‘예시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라고 일컫는다. 이는 신좌파의 유산으로, 시위대 안에서 폭력과 권위 그리고 위계가 없는 새로운 정치를 미리 실현한다는 뜻을 담았다. 월가 점령시위에 뛰어들었던 무정부주의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런 시위대의 특성을 높이 샀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조 프리먼은 1972년에 이미 페미니즘 운동이 발목 잡힌 원인으로 겉으로만 평등한 조직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프리먼은 조직화되지 않는 운동 방식을 ‘무구조’라고 꼬집었다. 수평주의적 대규모 운동은 정작 필요할 때 정치적 대표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기껏 따놓은 혁명의 과실을 군대나 과두정치인, 극우파에게 뺏기기도 했다. “반동적 반혁명”이었다.
저자가 취재한 10개 국가 중 7개 국가는 단순한 실패 이상의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2013년 6월 브라질 무상 대중교통 운동의 성과는 ‘자유브라질운동’, ‘거리로나오자’ 같은 거짓말로 점철된 우파 단체가 가져갔고 브라질에서는 잇달아 우파 정권이 탄생했다. 저자는 수평주의가 어떤 의미에서는 ‘반 대의정치’와 동의어라고 본다.
2024년 12월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한국의 촛불 혁명도 짤막하게 언급한다. 한국의 경우 혁명이 성과를 거둔 듯하지만 이는 광장의 요구가 명백하고도 달성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딱 잘라 말한다. 물론 2024년 말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 거리 시위에 나선 한국의 시민들도 이런 ‘광장의 혁명’이 전과 달리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집요한 취재다. 저자는 2010년부터 10년 동안 분출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담론의 역사를 추적했다. 튀니지, 브라질, 튀르키예, 이집트, 미국, 홍콩, 한국 등 12개 나라에서 200명이 넘는 시민, 정치인 등을 만나 인터뷰했다. 대규모 문헌 조사와 자료수집을 통해 알게 된 점은 역사가 기독교의 세계관처럼 일직선으로 발전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1년 2월6일(현지시각)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 있는 탱크와 군인들을 보고 이집트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듯 휴대전화기와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다. 카이로/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
신자유주의라는 세계 체제의 구조를 바꾸려는 열망이 활화산처럼 들끓으면서 우파 또한 잠에서 깨어났다. 세계 광장의 시민은 서로 다른 나라의 시위를 참조했지만 우파 역시 좌파의 시위 방식이나 주장을 베끼고 성과를 탈취했다. 현실과 담론은 서로 얽혀들면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어렵게 했다. 영화 ‘헝거게임’에서 주인공이 독재 권력에 맞서면서 내뱉는 대사에서 따온 ‘우리가 불타오르면, 너희도 함께 불타게 될 것’(If we burn, you burn with us)이라는 구호는 저항과 연대 의지를 담아 홍콩 시위에서 널리 사용됐고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멋있는 구호는 현실을 바꾸는 만능열쇠가 아니었다. 이 책의 원제(If We Burn) 또한 여기서 가져왔다.
저자가 제안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는 ‘대표성’에 있다. 협상, 개혁, 양보는 모두 대표성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대변할 수 없는 운동은 외부에서 해석되고, 때론 왜곡되기도 했다. “조직적인 운동을 만들라”, “대표성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인터뷰이의 조언을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어떤 새로운 집단이 과감하게 그 권력의 공백에 뛰어들어 그 자리를 지키고 사회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윤석열 탄핵 광장의 빛이 어디로 갔는지 되묻고 있는 한국의 좌파, 페미니스트,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도 이 책은 꽤 도움이 될 성싶다.
‘광장의 역설’을 쓴 국제분야 전문기자 빈센트 베빈스. 2010년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취재했다. 위키피디아 |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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