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분량 ‘사자성어 큰사전’ 77세에 펴낸 임무출 前 국어교사
대구 남구의 자택 서재에서 ‘사자성어 큰사전’을 펴든 임무출 박사는 “우리의 삶에는 모순이 있어도 사자성어에는 모순이 없다”고 했다./김동환 기자 |
14년 전의 일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어린 손주가 꿈에 나타나 물었다. “할아버지, 미인박명(美人薄命)이 무슨 뜻이에요?” 잠을 깨고 나서 결심한 것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사자성어(四字成語) 사전을 편찬해야겠다!’ 경북 경산의 진량중·고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다 정년을 맞을 무렵이었다.
“이제야 완성했습니다.” 지난 7일 대구 남구 자택에서 만난 임무출(77) 박사가 크고 두꺼운 책 두 권을 책상에 올려놨다. 종이 사전이 멸종된 듯한 2025년에 나온 신간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그가 혼자 집필한 ‘사자성어 큰사전’(박이정)은 원고지 3만여 장, 3044쪽 분량에 8070개 표제어를 수록한 국내 최대 분량의 사자성어 사전이다.
그는 과거에도 사전 편찬으로 주목을 받았었다. 근대 문학작품의 어휘들을 해설한 ‘채만식 어휘사전’ ‘김유정 어휘사전’ 등을 냈다. 영남대 재학 시절 스승이 붙여 준 ‘의지의 사나이’라는 별명에 이어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 ‘천연기념물’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왜 사자성어 사전을 썼나? “그 짧은 말 속에 역사와 의미와 교훈과 지혜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자성어는 불멸의 언어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오직 사자성어만이 동네 어귀의 수백 년 된 느티나무처럼 지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머물며 우리말을 더욱 풍요롭게 하죠. 삶엔 모순이 있어도 사자성어엔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돌을 깨서 산을 옮기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길고 지난한 가시밭길이었다. “왜 돈도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느냐”는 잔소리와 “인터넷 찾아보면 다 나오는데 뭐 하러…”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러나 막상 인터넷엔 부정확한 정보가 넘쳐났다. 의외로 자료가 빈약했고, 출전이라고 알려진 책을 찾아보니 그런 말이 없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에둘러 해석한 의역만 많을 뿐 글자 하나하나를 정확히 짚어 해석한 직역은 거의 없었다. 글자 그대로 사자성어를 풀이하고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게 문해력을 키우는 정석이라 여겼지만, 이 작업은 미답의 길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는 어조사까지도 무시하지 않고 해석했는데 “연극 무대의 조연 배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14년의 세월 동안 목과 어깨에 통증이 생겼고 위염과 편두통도 작업을 괴롭혔다. 그러나 ‘매일 조금씩 꾸준히 쓴다’는 ‘매·조·꾸’ 원칙을 지켰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날마다 왕복 4㎞를 걸었고, 법정 스님과 김형석 교수 같은 유명인의 수필집을 읽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은 한마디로 ‘노력의 결정체’ ‘끝장의 끝판왕’이라 할 치밀한 해설로 말문이 막히게 한다. 원고지 23매 분량으로 쓴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경우 출전인 ‘사기’ 회음후열전의 원문인 한(漢) 고조 유방과 한신의 대화를 자세히 수록했다. 이어 문장 해석과 역사적 상황, 고유명사를 낱낱이 설명한 뒤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알고 보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말’이라고 해설했다. 다른 자료를 찾을 필요 없게끔 모든 궁금증을 해소한 것이다.
임 박사는 ‘우공이산’ ‘유비무환(有備無患)’ ‘유지경성(有志竟成·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을 자신의 ‘사자성어 베스트 3’으로 꼽았다. 후속 계획도 꽉 차 있다. ‘사자성어 인물사전’ 등을 후속작으로 내고, 장기적으론 무궁무진한 고사성어의 바다를 통해 사전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아, 건강이 허락해야 할 텐데요….”
[대구=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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