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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상법의 족쇄 vs 머스크의 날개

조선일보 이길성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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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상법의 족쇄 vs 머스크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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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상법 잣대론 소송감 머스크
서학 개미들은 올인 투자
우리 경영자들은 족쇄 늘어
도전 장려할 法 보완 절실
테슬라의 CEO이자 X의 소유주인 일론 머스크./로이터 연합뉴스

테슬라의 CEO이자 X의 소유주인 일론 머스크./로이터 연합뉴스


사업과 무관한 회사를 인수하면서 주주에겐 일언반구도 없다. 회사 자금·인력을 자신이 소유한 다른 회사에 투입한다. ‘말폭탄’으로 수시로 주가를 흔든다. 법원이 제동을 건 천문학적 성과 보상안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정당을 만든다. 동생, 친구, 측근이 포진한 이사회는 그냥 거수기다. 한국 상법 개정안이 적용됐다면 진작 이사진이 법정에 섰을 것 같은, 미국 테슬라 얘기다.

지난 3일 상법 개정안 통과에 한국 개미(개인 투자자)들은 환호했다. 총수 전횡을 차단할 법적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사는 총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조항은 짧지만 강력하다. 이제 한국의 최고경영자(CEO)와 이사들은 전략적 결정을 내릴 때 “주주 이익에 반하지 않나” “전체에 공평했나”라는 물음 앞에 움츠려들 수밖에 없다.

증시에 울리는 개미들의 환호를 들으며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를 떠올렸다. 한국 CEO에겐 더 강한 족쇄가 필요하다는 우리 개미들은 머스크는 절대 신봉한다. 한국 개미들이 보유한 테슬라 주식은 약 211억달러(약 28조7000억원)어치나 된다. 미 증시의 그 어떤 종목과도 비교가 무의미한 압도적 1위다. 자신의 가용 자금 거의 전부를 테슬라에 올인한 투자자도 적잖다.

머스크가 온갖 전횡으로 개미들의 속을 끓이면서도 그들의 신봉을 받는 이유는 모두가 다 안다. 혁신가로서 압도적 능력 덕분이다. 전기차 산업에서 그가 이룬 혁신은 세계 경영사에서도 전무후무하다. 하지만 그런 머스크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다. 테슬라의 성공은 탁월한 경영자의 역량만큼이나 미국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제도와 토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 때문이다.

테슬라는 2003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16년간 적자를 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가능성을 믿고 실패를 용인하는 실리콘밸리 특유의 투자 문화 덕분이었다. 테슬라가 초기 생산을 시작하고 민간투자를 추가로 유치하는 과정에선 미국 정부의 대규모 저리 융자 같은 정책 지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마리아나 마추카토 교수는 미국에 대해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도 모험을 감수하는 기업가형 국가”라고 칭찬한다. 머스크의 괴벽과 파격을 관용하는 토양도 빼놓을 수 없다. 실패 용인과 기업 같은 국가, 기업가에 대한 관용은 한국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머스크를 수입한다고 한들, 한국에서 테슬라 같은 기업을 만들 수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우리 재계에서 한 기업 주가를 좌우할 만큼 영향력 있는 스타 CEO를 찾기 힘든 건, 개인 역량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업 CEO와 이사회는 사회와 동떨어진 섬이 아니다. 좋은 경영자와 기업은 결국 좋은 토양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CEO의 결정 하나하나에 ‘공평했는가’라며 묻지 마 질문이 이어진다면 한국의 경영자들이 선택할 길은 뻔하다. ‘안전 지상주의’다. ‘한국판 머스크’는커녕 평범한 전략가조차 키우지 못할 것이다. 척박한 토양 속 한국 경영자들에게 이번 상법은 무거운 추를 하나 더 매단 셈이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 분업 체계의 최고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강자로 우뚝 선 분야마다 중국에 하나하나 따라잡히고 있다. 미국도 더 이상 과거처럼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제 한국만의 새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로선 전례 없는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법 개정안은 좋은 취지의 법이지만, 과감한 도전을 유도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는 결이 맞지 않는다. 우리 경영자들의 기를 살려줄 보완책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이길성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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