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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Gs16] 봉오동 독립전쟁의 영웅을 아는가...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 80주기 추도식

SDG뉴스 SDG뉴스 배병호 생물다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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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Gs16] 봉오동 독립전쟁의 영웅을 아는가...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 80주기 추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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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장군(1885~1945) 순국 80주기 추도식이 지난 5일 2시 30도를 넘는 폭염속에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김영호, 22대 국회 교육위원장) 주최로 열였다.

추모식은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의 실질적인 주역으로 활약했던 최운산 장군에 대한 추모와 함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운산 장군 3형제(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생애와 역사적인 사실을 짚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됐다.

추모식은 김영호 이사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최운산 장군의 약사 보고와 추모영상에 이어 진강현 서울북부보훈청장, 이종찬 광복회장, 함세웅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이사장, 김성곤 사단법인 평화 이사장의 추모사가 있었다.
최운산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 기념촬영 (사진=SDG뉴스)

최운산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 기념촬영 (사진=SDG뉴스)



이어 추모 공연으로 종합예술단 봄날과 소리 가객 김숨 선생의 추도식장을 울리는 공연이 있었으며, 헌화 및 분향에 이어 국방부 의장대의 "총발사 및 묵념으로 최운산 장군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했다.

최운산 장군은 106년 전 북간도 봉오동에 대한민국 첫군대 "대한군무도독부"를 자력으로 창설하고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간도 제1의 거부로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의 숨은 영웅이다.
지명이 표시된 지역이 모두 최운산 장군 소유했던 지역으로 직선거리만 수십km에 이른다.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에서 멀지 않은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군자금을 제공하고 운영을 지원했다.(사진=최운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지명이 표시된 지역이 모두 최운산 장군 소유했던 지역으로 직선거리만 수십km에 이른다.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에서 멀지 않은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군자금을 제공하고 운영을 지원했다.(사진=최운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을 위시한 도문, 석현,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 등 10여개 지방을 소유한 대지주로 러시아군에 소와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한 무역업자로 연해주 독립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콩기름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을 비'한 여러 생필품 공장을 운영한 기업가였다.


함경북도 온성지역의 친척들과 동포들을 불러들여 북간도 봉오동을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전진기지로 만들면서 마적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병부대를 운영하던 최운산 장군은 1912년 '봉오동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중국군 사병과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켜 독립군부대를 "직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많이 알려진 동 시기에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우당 이회영 일가의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와 간도지역 토박이로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의 독립운동 일대기와는 상당 부분 비견이 되기에 향후 이부분에 대해 재"명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있을 것 같다.
북간도 무장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비 (최운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북간도 무장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비 (최운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1919년 3월 26일 최진동 최운산 형제는 왕청현 백초구에서 1500명, 5월 18일 양수천자에서 수백명을 모아 독립선언식을 개최하는 등 북간도지역 3.1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 장군이 훈련 양성한 670여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했다. 형 최진동 장군이 사령관으로 취임하고, 최운산 장군은 참모장, 동생 최치흥 장군은 작전참모로 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군무도독부를 이끌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을 선포하자 최운산 장군은 대규모 토지를 매각하고 1차대전 죵료로 귀국하던 체코군단의 무기를 대량 구입해 봉오동에 결집한 독립군을 완전 무장시키며 독립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봉오동의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최운산 장군의 자금력과 인적 네트워크 덕분에 러시아군과 체코군에서 신식무기를 계속 사들여 봉오동과 천산리에서 완전무장하고 일본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 내내 간도 지역에서 최운산 장군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나 애국지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 후 기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의 사진. 모두 정식 군복을 입고 신형무기인 소총을 어깨에 메고 탄창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사진=최운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 후 기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의 사진. 모두 정식 군복을 입고 신형무기인 소총을 어깨에 메고 탄창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사진=최운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항일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전적인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의 대승에 힘입어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고 강압적 일제 통치 아래에서도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 수가 있었다. 그동안 만주 독립운동은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독립군들이 "국의 독립이라는 우국충정 하나로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게릴라전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 독립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투가 가능하도록 정신적·물질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역사학계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은 "선 동포들을 마적들로부터 보호하던 사병부대를 모체로 1912년부터 봉오동사관학교를 열어 독립군을 양성했고, 1919년 임시정부 수립 후 670명 규모의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했다. '최진동 최운산' 형제는 1920년 간도의 크고 작은 독립군부대를 결집해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봉오동에 창설했다. 3.1운동 이후 갑자기 늘어난 독립군을 위해 최운산 장군의 소유지 '서대파와 십리평'에 "북로군정서"와 "사관연성소" 창설을 주도했다. 당시 간도 제일의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이 몇천 명에 달하는 독립군의 식량과 군복, 무기 공급 등 초기의 군자금 일체를 자비로 감당했다.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김영호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이번 추모식을 시작으로 북간도 무장 독립전쟁의 바른 역사를 널리 알리고 '최운산 장군'을 비'해 그동안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못했던 독립군들의 삶을 재"명해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또한 "만주 무장 독립전쟁의 승리가 그동안 알려진 바와 같이 몇 명의 영웅이 이뤄낸 신화적인 승리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힘을 합치고, 치열하게 살아낸 삶을 통해 이뤄낸 사실이란 것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SDG뉴스 배병호 생물다양성 기자/SDG 연구소 소장< Copyright SDG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