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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무, 방한 닷새전 취소… 또 스텝 꼬인 한미 외교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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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무, 방한 닷새전 취소… 또 스텝 꼬인 한미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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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오, 이스라엘 문제로 못 와
정상회담 일정·의제 협의 차질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AP 연합뉴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AP 연합뉴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8일로 예정됐던 한국 방문을 닷새 앞두고 취소를 통보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3일 “한미는 루비오 장관의 방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협의해 왔으나 미 내부 사정상 조만간 방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미는 고위급 인사 교류에 대해 지속해서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첫 미국 고위급 인사의 방한이 취소돼, 한미 정상회담 조율의 불투명성은 한층 높아졌다.

당초 루비오 장관은 오는 10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 참석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한미 양국은 루비오 장관이 8~9일 방한해 이재명 대통령을 예방하는 일정을 검토해 왔다. 우리 정부는 루비오 장관과 면담할 때 이달 말로 추진해 온 한미 정상회담의 구체 일정과 의제도 협의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국무부는 방한 닷새를 앞둔 이날 새벽(현지 시각 2일) ‘급한 사정’을 이유로 일정 취소를 통보했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오는 7일 급히 방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루비오 장관이 이 자리에 배석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루비오 장관은 ARF만 참석하고 일본·한국 순방 계획은 취소한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취임 후 첫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이 확정되지 않는 가운데, 루비오 장관 방한까지 성사되지 않자 외교가에선 “한미 관계에 난기류가 흐르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한미 정상회담이 8월 이후로 늦어지면 일본·중국 등 다른 나라와 정상 외교를 벌이는 일정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중동에 밀리는 한반도 이슈… 한미 정상회담 더 늦어질 가능성

정부는 루비오 장관 방한을 닷새 앞둔 3일 취소 통보를 받기 전까지 이와 관련한 미 정부 기류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전날까지도 이재명 대통령의 루비오 장관 접견 등 구체적 일정을 검토해 왔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루비오 장관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겸하고 있어 업무가 많다고 해도 주요 동맹인 한국 첫 방문 일정을 임박해 취소하는 건 이례적”이라고 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아직 인사청문회 날짜도 잡지 못해, 루비오 장관의 ‘카운터파트’인 외교부 장관이 공석인 상황도 방한 취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미 고위급 인사의 첫 방한이 막판에 무산되자,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한국 문제가 중동 분쟁이나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후순위로 밀릴 것이란 우려가 현실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루비오 장관이 방한을 취소하고 배석할 예정인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정상회담에서는 가자지구 휴전과 이란 문제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대중 견제와 북핵 대응 등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한국이 주요 파트너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듯한 모습도 관찰된다”고 말했다.


루비오 장관은 방한과 함께 방일 일정도 취소했다. 그러나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과 루비오 장관은 이미 지난 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일·호주·인도 4국의 쿼드(QUAD) 외교장관 회의에서 만났다. 여기서 4국은 “북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여러 건 위반해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발사로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구하는 것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냈다. 한미 정상회담 논의가 길어지는 가운데, 북핵 규탄 성명이 쿼드 협의체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야 외무상과 루비오 장관은 지난 1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후 장관 회담을 열고, 이를 통해 트럼프 취임 18일 만인 2월 7일 미·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이날 루비오 장관의 방한 취소에 대해 “한국과 벌일 협상이나 외교적 사안이 고려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비오 장관의 방한 기간 한미 정상회담 의제 협의를 하려 했던 우리 정부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한미 정상회담 확정 발표가 늦어지자, 관세 협상이나 국방비 인상 같은 현안에서 양국이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우세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부과한 국가별 관세 15%의 유예 시한이 8일로 다가왔지만, 한미 양측은 아직 협상의 접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시한 내 협상 타결 가능성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확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에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수준까지 올릴 것도 요구하고 있다. 올해 우리 국방비 61조원은 GDP 대비 2.3% 정도로, 정부는 단기간에 5%까지 늘리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지연됨으로써 다른 국가와 정상회담 일정을 조율하기도 복잡해지고 있다. 정부는 당초 7월 말, 늦어도 8월 초 워싱턴 DC에서 한미 회담을 하고 이후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통상 우리 대통령은 취임 후 한미 정상회담을 제일 먼저 하고 이후 일본 또는 중국과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순조롭게 끼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G7 정상회의가 열린 캐나다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지만, 이는 다자 회의 계기의 만남이었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이 대통령이 방미도 못 한 상황에서 중국은 9월 전승절에 초청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알리며 한국 끌어당기기 전략을 펴고 있다”면서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에 ‘한미 동맹 우선’이라는 인식을 분명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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