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인연’ U2 보노, 고별 詩 낭독
1961년 소련에 맞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미 국제개발처(USAID)가 64년 역사를 끝으로 1일 국무부 산하로 통합됐다. 사진은 지난 2월 21일 해고 통보를 받은 USAID 직원들이 미국 워싱턴 DC의 사무실을 나서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로이터 연합뉴스 |
“그들(트럼프 행정부)은 당신들을 도둑이라 불렀지만, 사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어떻게 좌파의 수사(修辭)일 수 있나요.”
세계적 록밴드 U2의 보컬이자 사회운동가인 보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미 국제개발처(USAID)를 기리는 헌시(獻詩)를 읽어 내려갔다. 화면 너머의 USAID 직원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댓글창에는 작별 인사를 나누는 글이 줄을 이었다.
지난 64년 동안 미국의 대외 원조를 담당해 온 USAID는 지난 30일 전현직 직원 수천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온라인 고별 행사를 진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해외 원조를 ‘급진 좌파의 예산 낭비’로 규정하면서 USAID는 이날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HIV·에이즈 구호 사업 홍보대사를 맡는 등 20년 이상 USAID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보노는 이날 깜짝 손님으로 등장해 직원들을 위로했다. 그는 “당신들은 늘 우리를 위해 존재했다. 정치가 우리를 엉망으로 만들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낮추진 말자(don’t think any less of us, when politics makes a mess of us)”고 했다. 리사 셰크트먼 USAID 대외 전략 고문은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며 “내일은 한 시대의 종말”이라고 했다.
U2의 보컬이자 사회운동가인 보노./AFP 연합뉴스 |
USAID는 반세기 넘게 미국의 해외 인도주의 활동을 수행해 온 세계 최대 개발 협력 기구였다. 1961년 존 F 케네디 정권에서 독립 부처로 설립돼 냉전 시대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자유주의 국가에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확산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수단·시리아·가자지구 등 분쟁 지역에 식수와 구호품을 지원했고, 농업 혁신과 기아 퇴치를 위한 사업을 실시해 왔다. 에이즈·말라리아·결핵 등 질병 확산을 막는 데에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21년까지 USAID 사업은 전 세계 133국에서 9200만명의 생명을 구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계획은 물론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개발연구원(KDI) 설립 등에 USAID 차관이 투입됐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직후 가장 먼저 USAID를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는 취임 당일 모든 해외 원조 사업의 자금 지출을 90일간 동결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고, 이후 USAID는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일했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 경영자(CEO)도 USAID를 “범죄 집단”이라 칭하면서 해외 원조와 개발 협력이 예산 낭비라고 주장하며 기름을 부었다. 1만명에 달했던 직원 대다수는 230여 명을 제외하고 해고되거나 강제 휴직에 들어갔다. 트럼프 행정부는 결국 지난 3월, 전체 해외 원조 사업의 83%를 폐지하고 USAID를 7월 1일까지 국무부 산하로 통합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로고/로이터 연합뉴스 |
이날 고별 행사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이 등장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한목소리로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했다. 민주당 소속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USAID 해체는 “엄청난 실수(a colossal mistake)”라며 “USAID를 무너뜨리는 것은 비극이며 재앙”이라고 했다. 재임 당시 USAID를 외교 안보 전략의 핵심 축으로 명시하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USAID 국장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위상을 강화했던 그는 직원들에게 “여러분의 존재와 사업이 전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해치고, 미국에도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했다. 2003년 USAID를 통해 ‘긴급 에이즈 구호 계획(PEPFAR)’을 주도했던 공화당 소속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2500만명의 생명을 살린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선의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지금 살아 있는 그 2500만명이 USAID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USAID 해체가 전 세계 인도주의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의학 저널 ‘랜싯’은 USAID가 지원하던 보건·인도주의 프로그램이 사라지면서 앞으로 5년간 140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것으로 추산했다. 이 중 450만명이 5세 미만 아동이다. 이미 올해 초 미국의 해외 인도주의 활동 대부분이 중단되면서 취약 국가에서 운영되던 급식소와 보건 클리닉이 문을 닫고, 의약품·모기장·영양식 등의 필수 구호품 지원도 대폭 줄거나 지연된 상황이다.
미 국무부는 이번 주 안으로 USAID를 대체할 새로운 외교 지원 조직을 설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해당 조직의 명칭으론 ‘아메리카 퍼스트’가 유력하다. 이날 국무부는 “새로운 절차는 철저한 감시 체계를 보장하고, 미국 납세자의 세금이 국가 이익 증진을 위해 사용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김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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