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이사는 주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을 최초로 명시한 판례는 2004년 5월 대법원 판결문이다. 이 사건은 한 기업의 대표이사와 부사장이 짜고 신주 35만주를 공짜(가장 납입)로 자신과 지인들에게 발행해 기존 주주들에게 지분가치 희석 등 재산상 피해를 입힌 게 배임에 해당하는지를 다퉜다.
원심은 “회사 대표는 주주가 아닌 회사의 일을 보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신주 발행 땐 일반 주주들의 권리 또는 주식 가치를 해쳐서는 안 될 임무가 있다”며 업무상 배임죄의 유죄를 인정했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표이사가 일반 주주들의 권리와 주식 가치 보존 임무를 대신하거나 주주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를 이유로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 최초의 판례는 ‘삼성그룹 판결’에 적용되며 유명해졌다. 서울중앙지법은 2017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승계를 위한 ‘불공정 합병 비율’ 논란이 불거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삼성물산 이사들이 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한 합병 비율을 승인해 충실 의무를 위반했다는 원고 쪽 주장을 이처럼 반박했다. “이사가 일반 주주들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볼 수 없고, 회사에 이익이 될 거라 보고 합병을 승인했다면 개별 주주의 이익과 손실을 고려할 의무까지 있진 않다.”
가장 많이 알려진 사례는 2009년 대법원의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경영권 승계 목적) 사건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에버랜드 전 대표이사들의 업무상 배임죄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건, 캐스팅보트를 쥔 양승태 대법관의 견해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신주 등의 발행 조건으로 인해 주주에게 불이익이나 손해가 발생했다 해도, 회사에 대한 임무 위배가 없는 한 이사를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같이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역시 무죄가 확정됐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고, ‘주주 이익 보호’ 의무를 명시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혹자는 법 통과일을 ‘한국 자본시장의 독립기념일’이라 부르겠다고 한다.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오명을 듣는 국내 증시에서 켜켜이 쌓인 소수 주주들의 오랜 분노를 재계는 헤아려야 할 것이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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