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축구국가대표팀 출신 미드필더 제시 린가드. <연합뉴스> |
미국 일부 대학은 수능 영어 성적을 국제 입학 전형에서 토플(TOEFL) 점수 대체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오리건 대학이나 스토니 브룩 등이 대표적입니다. 수능의 난도와 신뢰도는 국내를 넘어 글로벌 영어 평가 도구로서도 인정받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 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 미드필더 제시 린가드(FC 서울)가 2024학년도 수능 영어 24번 지문을 푸는 영상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 몇 줄 읽어 내려가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오 마이(Oh my)… 말도 안 돼. 이걸 푼다고요?”
대한민국 수능 문제를 푸는 린가드. <사진 = FC서울> |
이 한 편의 영상은 당시 상당한 화제를 끌었습니다. ‘토종 영국인도 어려워하는 문제를 고교생이 푼다니’ 같은 댓글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처음은 아닙니다.
다른 유튜브 채널에서 영국 교사와 고교생들에게 수능 영어를 풀게 했을 때도 참가자 대다수가 첫 문제부터 난색을 보였습니다. 한 교사는 “satiety(포만감) 같은 단어는 과학 전문지를 읽지 않는 한 교실에서 쓸 일이 없다”라며 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서울 한 어학원의 원어민 강사는 ‘1분 안에 읽고 답을 체크하라는 건 통역사 시험에서도 쉽지 않은 속도’라고 말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문제는 비단 한국만의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비슷한 풍경은 베트남에서도 연출됩니다. 베트남 국영 일간 VN익스프레스에 따르면 호찌민시의 영어 강사 네이선 브룩스(영국 출신)는 친구들의 권유로 2025학년도 베트남 고교 졸업시험 영어를 풀다가 50분 만에 ‘완주 불가’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시험지를 가리키며 “지문 구조가 퍼즐처럼 얽혀 있어 원어민도 중간에 맥락을 놓치기 십상”이라고 토로했습니다. 틱톡에서는 ‘외국인 도전 고교 졸업 영어’ 영상이 수천만 회 재생됐고, 한 미국인 크리에이터는 40문항 중 6문항을 틀리며 “독해만으로도 체력이 방전된다”는 후기를 남겼습니다.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대학 졸업식을 하는 학생들. <게티이미지뱅크> |
한국과 베트남의 영어 시험은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첫째, 학술·전문 어휘의 밀도가 높습니다. 생물학 논문에서나 등장할 법한 단어가 섞여 있기에, 배경지식이 없다면 어휘 추론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둘째, 지문과 문항 사이의 논리 연결 고리가 복잡합니다. 일상 회화보다는 학술 저널 스타일에 가깝다 보니,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주절과 종속절 사이 복잡한 미로에 빠져 전체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또한 제한 시간 대비 읽어야 할 분량이 많습니다. 수능 영어 45문항은 70분, 베트남 졸업시험 40문항은 60분 안에 해결해야 하는데, 원어민 교사들조차 “숨 돌릴 틈이 없다”고 말합니다.
베트남 교육 컨설턴트 레호앙퐁은 “두 시험 모두 실제 의사소통 능력을 묻는다기보다 정보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선별’하느냐를 겨루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문장 패턴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비판적 독해와 추론 중심 학습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특화된 영어 시험이 안고 있는 딜레마는 분명합니다. 상위권을 선별하는 기능만 보자면 그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합격선을 가르는 데 정확한 기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용성 측면에서 보자면 사실 좀 취약합니다. 원어민조차 몇 번씩 읽어야 의미가 잡히는 문장은 교실 밖 현실에서는 좀처럼 쓸 일이 없습니다. 그 결과 학교와 학원 현장은 시험 패턴에 적응하기 위해 ‘속독’ 전략을 가르치고, 말하기와 쓰기 역량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지적이 계속됩니다.
이 같은 구조는 ‘시험 대비 시장’의 몸집을 키우는 동시에, ‘영어를 언어로서 즐기는 문화’를 위축시키는 역설을 낳습니다. 구글 번역과 AI 통번역기가 보편화되는 시대, “시험이 달라졌다면 교실도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가 힘을 얻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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