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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씨는 말랐는데, 세금은 쌓였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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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씨는 말랐는데, 세금은 쌓였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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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있는 ‘고기잡이’. 발로 둘러친 어장에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아내는 모습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있는 ‘고기잡이’. 발로 둘러친 어장에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아내는 모습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11년(중종 6년) 4월8일 부안현감(扶安縣監) 김개(金漑)는 길고 복잡한 상소를 올렸다. 모두 네가지 문제를 거론했는데, 그중 알아듣기 쉬운 한가지를 골라 읽어보자. 조선 시대에는 물고기를 잡는 수단으로 어전(漁箭)이란 것이 있었다. ‘어살’이라고도 하는데, 바닷가나 강가에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울타리 모양으로 둘러쳐 물고기가 들게 하여 잡는 장치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호조의 소관 사항을 규정한 법전)의 ‘어염’(魚鹽)조는 “어전과 염분(鹽盆, 소금 굽는 가마)은 장부를 만들어 호조와 각 도, 각 고을에 보관하고, 숨기는 자가 있을 경우 장 80대에 처하고 몰수한다” 하고, 이어 “어전은 가난한 백성에게 주되 3년이 되면 교체한다”고 하였다. 곧 어전은 재산(땅) 없는 가난한 백성의 몫으로 떼어준 것이었다. 물론 어전에도 세금, 곧 어전세를 물린다. 김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어전세다. 원래 어전에서는 물고기를 잡으면 일정한 양을 사재감(司宰監)에 바쳤다. 사재감은 어류·육류·소금·장작·진상품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 호조 산하 관청이다. 그런데 1501년(연산군 7년) 물고기 대신 포목을 받기 시작했다. 생선이 상하기 쉽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액이 과도하다. 잡아들이는 생선의 절반을 바치게 했던 것이다. 어전이 황폐해져 생선이 잡히지 않아도 절반의 세액은 바뀌지 않는다. 김개는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김개는 부안현 활도(猾島)의 상황을 소상히 보고한다. 활도 부근 바다에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으므로 전답이 없는 백성들이 이곳에 15곳이 넘는 어전을 설치하였다. 과할 정도로 많은 세금도 어획량이 많았기에 꼬박꼬박 어기지 않고 바쳤다. 그런데 1505년(연산군 11년)부터 청어의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금은 깎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세금을 낼 방도가 없었다. 조정에서 해결책을 내놓았다. 조정은 1506년 이전에 황폐해진 모든 어전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리지 않기로 하고, 1507년 이후 어전은 황폐한 정도를 면밀하게 조사해 면세할 곳은 면세해 주었다. 곧 황폐한 정도에 따라 면세 여부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는가? 그랬다면 김개는 굳이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작성된 면세청원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에 작성된 면세청원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개는 조정의 면세 조치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에서 파견되는 관리는 1506년 이전부터 황폐해진 어전에도 청어가 많이 날 때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세금을 계속 물리고 있고, 1507년에 면세한 어전에 대해서도 50%의 세액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개는 1509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엄청난 규모로 남아 있는 미납 어전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전에 어전을 설치했던 사람들은 태반이 도망을 갔고 이웃 백성들도 따라서 달아났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도 가진 것이 없어 여러 해 세금을 바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개는 미납 세금을 이웃과 친족들에게 고루 분배하였다. 한꺼번에 내라고 닦달하지 않고 마련되는 대로 천천히 내게 하였다. 이것이 그나마 양심적인 관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3년이 되도록 절반도 징수할 수가 없었고 궁핍한 백성들의 상황을 보건대 앞으로도 징수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김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포목으로 어전세를 내게 하는 법을 폐기하고, 활도 어전의 1506년 이후 어전세는 절반을 탕감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종은 담당 관서에서 들어줄 만한 것은 들어주라고 했지만, 그 결과는 알려진 바 없다(담당 관서는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과잉 수탈이 부안현의 어전에서만 있었던 일이었던 것인가. 김개가 상소를 올리고 1년이 지나 강원도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여럿이지만, 역시 골자는 백성의 고통을 줄이자는 것, 다시 말해 수탈의 양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강과 거리가 먼 강원도의 궁벽한 오지에 목재를 공물로 배정했기 때문에 오지의 백성은 10배나 되는 값을 치르고 경강(京江)에서 목재를 사서 바친다는 것이다. 공물 징수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형산은 재목을 사용하는 관서에서 재목 생산지에 가서 재목을 구입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결과는 알 수 없다.



중종은 연산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는 날 그는 폭군이 만든 법을 모두 폐기하고 한결같이 조종(祖宗)의 법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사림(己卯士林) 역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개혁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김개와 고형산이 상소를 올렸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 시기 백성들의 삶은 연산군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고형산은 상소에서 “창고에 남은 곡식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은 더욱더 불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 세력은 도덕 정치를 표방했지만 그것은 백성의 고통을 더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백성의 삶은 도리어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다. 연산군을 내쫓고 장록수의 목을 베는 것으로 반정(反正)은 완성되었다 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백성을 위한 변화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2025년 6월3일 대선이 있었고 대통령이 바뀌었다. 이제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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