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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하고 유인하고 소통하고…놀라운 식물의 향기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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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하고 유인하고 소통하고…놀라운 식물의 향기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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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l 엘리스 버넌 펄스틴 지음, 라라 콜 개스팅어 그림, 김정은 옮김, 열린책들(2025)

향기 l 엘리스 버넌 펄스틴 지음, 라라 콜 개스팅어 그림, 김정은 옮김, 열린책들(2025)






우리는 좋은 향을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향은 대부분 식물에서 온다. 향해(향기 공해)라는 단어가 생겼을 정도로 온갖 사물과 공간에 향이 입혀지는 요즘, 그 상업화한 향이 추구하는 원형도 식물의 향이다. 내 집을 잠시만 둘러보아도 알겠다. 샴푸는 라벤더 향,주방 세제는 레몬 향, 손세정제는 백합과 이끼의 향, 치약은 민트 향이다. 우리는 물론 고기 냄새나 흙내에도 끌리지만, 그것은 탈취의 대상이지 몸에 지니고 싶은 향은 아니다. ‘향기’라는 제목을 단 이 책의 부제가 ‘식물이 빚어낸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이야기’인 것은 그 때문이다. 향기의 이야기는 식물의 이야기다.



하지만 식물이 인간을 위해서 그 향을 발산하는 것은 아니다. 빛과 물과 흙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합성하여 살아가는 식물이 그 소중한 자원을 그냥 인간들 기분 좋아지라고 사용할 리 만무하다. 식물의 향은 나방, 벌, 딱정벌레 같은 꽃가루받이 매개동물을 꾀는 유인책이다. 어떤 경우에는 식물을 뜯어 먹는 초식동물을 물리치려는 방어 무기이고, 질병에 손상된 부위를 다스리는 치유책이다. 식물들끼리 환경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소통 수단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재스민 없이는 향수도 없다’고 일컬어진다는 재스민을 예로 들어보자. 재스민다운 향기의 핵심은 자스몬산이라는 물질이다. 이 물질은 향기로써 나방을 불러들일 뿐 아니라, 동물이 낸 상처에 반응하여 신경독 같은 보호물질을 생성하게 하고, 주변 식물들이 위험을 감지하여 대비하게 한다. 이처럼 향을 내는 분자, 즉 휘발성 유기 화합물은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식물은 그 분자들을 요령 있게 조합하여 각자 독특한 향을 낸다. 방향 분자는 꽃뿐 아니라 꽃가루, 꿀, 씨앗, 줄기, 뿌리, 잎에도 있다.



장미로 인식될 만한 향을 인공적으로 합성하기 위해선 무려 300여 가지 성분이 필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장미로 인식될 만한 향을 인공적으로 합성하기 위해선 무려 300여 가지 성분이 필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인간은 문명 초기부터 식물의 향을 이용해왔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건넨 세 가지 선물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는데, 이중 유향과 몰약은 유향나무와 몰약나무의 수지에서 얻는 향료 겸 약재다. 수지란 식물이 보호용으로 생성하는 물질로, 그 속에 테르펜 같은 휘발성 화합물이 있기 때문에 독특한 향이 난다. 이런 나무줄기를 태우는 훈향에서 시작한 인간의 노력은 굳기름이나 용매로 꽃의 향기를 포착하고 증류하는 기법으로 나아갔고, 오늘날에는 ‘상부공간분석’이라는 기법 덕분에 꽃잎 한장만 있으면 그 향을 이루는 성분 분자들을 분석하여 목록을 출력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향의 정체를 화학적으로 분석하고 구성 분자들을 석유로부터 합성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모든 꽃의 향기를 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장미로 인식될 만한 향을 만드는 데는 무려 300여 가지 성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은방울꽃처럼 독성이 있기 때문에 식물에서 직접 향을 얻을 수 없고 얼추 비슷하게 조향한 수준에 만족해야 하는 꽃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야생생물학자 겸 조향사여서, 인간이 식물의 향을 사랑하고 이용해온 역사, 문화, 과학을 한 권에 담은 책 안에서도 조향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특히 생생하다.



앞으로 솔숲의 상쾌한 테르펜을 맡을 때마다, 식물계 최고의 조향사라는 흰 꽃들의 달콤한 향을 맡을 때마다, 비록 내가 꽃에 도움은 되지 않지만 나방처럼 이 향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이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리는 큰 행복 중 하나임을 떠올릴 것 같다.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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