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서울아산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갑자기 비가 올 때 대부분의 현지인은 비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으며 걷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비가 많이 내려 옷이 흠뻑 젖을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우산을 쓰거나 비를 피하려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가 올 것 같기만 해도 미리 우산을 꺼내 쓰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 이슬비가 오는 날 우산 없이 길을 걸은 기억이 있다. 빗방울을 맞으며 반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옷이 젖지 않았다. 분명히 비를 맞고 있었는데 왜 옷이 젖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같이 걷던 선친께 여쭤본 적이 있다. 그때 들은 설명은 이랬다. 옷을 적시는 수분의 양과 자연증발되는 수분의 양이 균형을 이루거나 증발되는 양이 더 많으면 옷이 잘 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론이야 어찌 됐든 이슬비 정도는 실제로 옷을 적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곧장 우산을 쓰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이 내리는 비가 탈모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언론에선 산성비를 '흑비'라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줬고, 특히 산성비가 탈모를 유발한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산성비=탈모'라는 연상이 대중의 인식에 강하게 자리잡았다.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서울 및 수도권에서 측정된 비의 산성도는 1980년대엔 평균 pH4.7 수준이었지만 이후 환경규제와 다양한 노력으로 최근엔 pH5.8~6.0 정도의 중간산성 수준으로 개선됐다. 산성비는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연소할 때 배출되는 이산화황과 질소산화물이 대기 중 수증기와 결합해 황산 및 질산으로 변해 빗물에 섞이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강수의 pH가 5.6 이하로 떨어진 경우를 산성비라고 부른다.
탈모를 유발하는 요인으로는 영양결핍, 감염, 약물 부작용, 그리고 환경적 자극 등이 있고 산성비는 이 중 환경적 자극에 해당할 수 있다. 산성비에 포함된 황산과 질산 성분이 두피의 pH 균형을 무너뜨리고 피부기능을 약화시키며 피지선의 과활성화 및 염증반응을 유도해 모발의 성장주기에 영향을 미쳐 탈모를 유발하거나 악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론적 가능성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우리나라에 내리는 비가 탈모를 직접적으로 유발한다는 명확한 과학적 검증은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산성비는 탈모의 주된 원인이라기보다 기존 두피질환이나 유전적 요인과 복합적으로 작용해 탈모를 유도하거나 악화시키는 보조적 환경요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산성비가 탈모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양과 빈도로 노출됐는지가 중요한 변수이므로 단순히 한두 번 비를 맞았다고 해서 탈모가 생기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 산성비가 탈모를 유발한다고 실험에서 입증됐다 하더라도 실제 사람에게 탈모를 유발할 가능성은 낮다.
우산을 쓰는 행위는 건강상 해로울 것이 없으며 오히려 개인위생을 지키는 습관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환경에서는 우산을 사용하는 데도 배려와 예절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우산을 쓰고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우산을 높이 들어주거나 살짝 비켜주는 작은 매너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점이 오히려 아쉽게 느껴진다. 이러한 일상 속 배려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가 맞는 비는 과거처럼 독성이 강한 산성비가 아니므로 불필요한 공포심은 덜어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산성비라고 두려워하는 빗물을 정수해 씻고 마신다. 비록 관심을 가지고 개선해야 하는 환경적 문제들이 있지만 최근 내리는 비는 탈모를 걱정할 만큼은 아니기 때문에 야외활동을 할 때 너무 조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상욱 서울아산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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