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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새 정부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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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새 정부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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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새 정부는 과거가 떠미는 힘으로 시작됐다. 구조적 급변기일수록 미래를 고민해야 하지만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었다. 더욱이 한국에는 아직도 진보와 보수라는 과거의 유령이 인사와 정책을 넘나든다. 지정학, 안보, 외교, 통상, 경제, 과학기술이 얽혀있는 복합성의 시대에 우리 정부는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시각보다 부처의 업무만 챙기는 분절된 사고에 익숙하다. 새 정부와 여당이 일을 잘할 것이란 기대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고,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그르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새 정부는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재정주도 성장의 유혹 물리치고

자주·균형 외교의 맹점 직시하며

입법부 권력을 자제하지 못하면

내·외부 충격으로 한국 좌초 우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에 입장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에 입장하고 있다. 뉴스1


먼저 적자 재정의 유혹이다. 한국의 민간부채와 정부 부채는 모두 위험 지역에 진입했다. 최근 한국은행은 국민소득 대비 민간부채가 200%를 넘어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직전과 유사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통화정책을 제약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금리를 경기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한국의 통화정책은 부동산 가격과 가계부채, 원화 급락과 인플레이션이라는 좁은 회랑에 갇혀 있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재정정책으로 경기를 살려보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올해 국민소득 대비 55%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는 일반 정부 부채도 선진국이면서 비(非)기축통화국인 11개국의 평균을 상회한다. 이대로 가면 10년 내 일반 정부 부채비율이 70%에 근접해 재정정책도 반사(半死) 상태에 빠진다. 반면 지정학 등의 여파로 한국에 가해질 외부 충격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대형 경제위기가 발생했는데도 정부의 대응 역량은 현저히 부족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칠 수도 있다.

새 정부는 경제성장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삼았다. 문제는 방법이다. 최근 미국 경제학자들은 부채를 늘리지 않으면서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을 연구해 발표했다. 가장 좋은 정책은 규제혁신이었다. 부채 증가 없이 가장 큰 성장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반면 모든 재정지출은 성장보다는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그나마 인적자본을 향상하는 재정지출이 제일 바람직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는 혁신성장이라는 정답 대신 재정주도 성장 심지어는 소득주도성장이라 우기며 쉬운 길만 찾았다. 국회는 오히려 규제를 강화해 관료주의를 심고 창의성을 제약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정책은 공정하면서도 유연한 제도를 만들고 창의형 인재를 교육하는 ‘혁신의 길’이다. AI 분야도 수백조 원 이상이 드는 설계와 개발보다 글로벌 생태계의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해 수출 산업으로 육성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 또 AI를 산업생산에 응용하고 바이오 등 첨단기술과 융합하는 분야에 세계 초일류가 돼야 한다. 추경은 필요하겠지만 선별과 효율성의 원칙을 지켜 정부 부채의 급증을 막아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균형 외교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미·중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 양국 관계를 모두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의 시효는 지났다. 대한민국은 약소국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바람직한 세계질서를 우방과 함께 만들어갈 역량을 가진 나라다. 우리는 한미동맹과 양립 가능한 대중·대러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전략적 선명성을 기조로 장기적 방향을 확실히 한다면, 그 안에서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해 우리가 움직일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핵심 공급망과 첨단 과학기술 분야를 제외한다면 중국과도 더 교류해야 한다. 그러나 자주, 균형, 동맹이라는 외교 노선을 모두 포괄하겠다는 시도는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 미국이 흔들릴수록 동맹의 축에 힘을 보태야 세계질서의 회복 탄력성이 커진다. 이런 차원에서 새 정부는 외교와 안보 부문 인사에 신중해야 한다. 적어도 주미대사와 주일대사는 해당국이 크게 환영할 인사를 임명해야 한다.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6회 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이 찬성 194표, 반대 3표, 기권 1표로 통과되고 있다. 뉴시스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6회 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이 찬성 194표, 반대 3표, 기권 1표로 통과되고 있다. 뉴시스


마지막으로 권력 집중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하는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024년 한국 민주주의를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하향 조정했다. 비상계엄 선포가 직접적 요인이었지만, EIU는 더 깊은 구조적 문제로 “정당 간의 뿌리 깊은 적대감과 타협을 꺼리는 태도”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불안정하다고 경고한다. 지금 행정부와 입법부가 하나의 권력인 상태에서 사법부의 견제 기능마저 위축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 추락한다. 여당은 과도한 입법 권력 행사를 자제해야 한다. 사법부 개혁은 독립적인 공론의 장에서 전문가와 사법부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변동성이 가장 큰 시기에 들어섰다. 외부 충격이 내부 혼란과 맞물린다면 국가 존립까지 염려해야 할 수 있다. 새 정부는 무거운 짐을 졌다. 선비의 원칙과 절제, 상인의 판단력과 영민함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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