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서울대 교수들의 제언 “진정한 적폐청산은 분권형 개헌”

조선일보 박정훈 기자
원문보기

서울대 교수들의 제언 “진정한 적폐청산은 분권형 개헌”

서울맑음 / -1.4 °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연구 발표회
“한국 성장 이끈 추격자 모델은 끝나
기초과학·AI 투자로 선도형 모델로"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 제공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 제공


서울대 교수들이 이달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에 대해 정치, 외교안보,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제언을 담은 정책 보고서를 발간하고 17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연구 발표회를 진행했다. 그간 한국의 성장을 이끈 추격자 모델이 끝나 기초과학, AI 분야에서의 대대적 투자를 통한 선도형 모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 사람을 겨냥한 처벌이 아닌 제도적 개헌이야말로 진정한 적폐 청산이라는 주장 등이 나왔다.

서울대 싱크탱크 국가미래전략원(전략원)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 관악구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성공하는 대통령의 길: 새 정부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연구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에선 정치·외교통상안보·경제·과학기술산업·사회·고등교육 6개 분야에 대한 서울대 교수들의 제언이 이어졌다.

과학기술산업 분야에 대한 제언을 맡은 이정동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진국 기술을 끊임없이 조금씩 추격해 마침내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은 현재 추격의 정점(Peak Korea)에 섰다”며 “이젠 남들도 해보지 못한 우리만의 고유 기술을 만드는 선도 모델로 전환해야 할 때”라고 했다.

이 교수는 그간 R&D 자원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 자원이 기초과학이 아닌 산업 발전에만 과도하게 집중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초과학 정책은 산업 정책의 하위 정책이었기에 시행착오를 회피하는 문화가 생겼고 기존 주력 산업 경쟁력 강화에만 초점을 둬왔다”며 “그 결과 지난 20~30년간 신산업은 태어나지 못했고 과거의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조선이 여전히 중심 산업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젠 산업은 기업이 알아서 잘하도록 둬야 하고 국가는 국가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그 ‘국가의 일’이 바로 기초과학”이라고 했다. 또 “작년 8월 네이처지의 한국 특집호에서 한국은 연구 개발 투자는 제법 하는데 산업계 성과로 안 이어진다고 지적했다”며 “과학기술의 아이디어가 산업 결과물로 나타나려면 기술을 현장에 적용해보고, 문제를 발견하고, 수정하는 시행착오의 축적 과정, 즉 스케일업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스케일업에 대한 큰 투자를 통해 관련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콜럼버스의 항해가 이사벨라 여왕의 자본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듯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과학기술의 스케일업 역시 시행착오 기간 인내할 수 있게 도와줄 자본이 필수적”이라며 “예대마진에 근거해 막대한 순수익을 내는 금융시장을 개혁해 기술 혁신을 위한 인내자본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치 분야 제언을 맡은 강원택 전략원장은 개헌을 강조했다. 강 원장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극심한 정치 양극화를 겪게 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작업 때문”이라며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이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처벌에 집중한 문재인 정부의 복수의 정치는 한국 사회를 두 진영으로 완전히 갈라놓았다”고 분석했다. 이어 “진정한 적폐 청산은 특정 인물에 대한 처벌이나 교체가 아니라 부패와 폐단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구조적, 관행적 개혁으로 이룰 수 있다”며 “한국 정치가 계속해서 갈등과 불신의 늪에 빠지게 만든 제왕적 대통령제를 해결하기 위한 분권형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강 원장은 선거 때 급조한 공약을 서두르지 말고 다듬을 것, 야당을 존중하고 끊임없이 소통할 것, 사법부 독립성을 존중하고 권력 행사를 절제할 것, 전임 정부들의 정책을 무작정 뒤집으려고 하지 말 것, 대통령 비서실이 아닌 행정부와 장관이 정책 추진의 중심이 되게 할 것, 소수의 동류 집단을 벗어나 폭넓게 인재를 등용할 것 등의 제언을 했다. 그는 “대선 이전 갈등의 한 축에 있었던 이 대통령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국민이 적지 않다”며 “임기 초반 이러한 불안을 신뢰로 바꾸는 포용의 리더십과 균형 있는 정책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외교통상안보 분야를 맡은 손인주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한미 결속 강화와 통합적, 단계적 대북 접근을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급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이 선도형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새 정부가 미국과 결속하고, 북한을 견인하며, 일본과 협력하고,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혁신을 선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한미 결속 강화를 위해 여야가 추천하는 정부·학계·기업 전문가들로 구성된 블루리본 위원회 설치를 통한 핵심 외교·통상·안보 정책의 지속성 보장, 방위산업공동 개발발 및 국방상호조달협정(RDPA) 체결 등을 제언했다.

손 교수는 새 정부의 대미 정책 방향에 대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대한 방어적 대응만으론 충분치 않다”며 “조선과 항공 산업을 중심으로 한 방산 MRO 협력,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등 에너지 협력, 그리고 AI·반도체 기술 동맹 강화를 통해 능동적인 전략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구축해야 한다”고도 했다.


손 교수는 북한에 대해선 ‘단기는 비핵화, 중기는 경제 통합, 장기는 통일이라는 로드맵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지정학적 변수와 북한 문제가 중첩된 현재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만 집중해 조속히 해결하려는 접근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거나 역풍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고, 북·러 간 밀착이 약화되는 시점이 북한의 비핵화 협상을 추진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후 토론 세션에서 남북 관계 개선과 비핵화가 상충되는 부분이 아닌지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손 교수는 “단기적으론 그럴 수 있으나 빠른 남북 관계가 아닌 바른 남북 관계를 위해선 비핵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고등교육 분야를 맡은 이진수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세운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대해 “대학 서열화 완화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책의 기본 방향성이 적절하다고 본다”면서도 “정책의 성공을 위해선 재정 지원을 넘어 서울대의 교육, 연구, 행정 등 소프트웨어를 각 거점 국립대학에 함께 공유하고 이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그는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같은 지역 대학 육성책이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지방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그는 “정주 여건 제공에 있어서는 사실 대학 교육보다 초·중·고 교육 여건이 더 중요할 수 있다”며 “부모들에게 서울로 가지 않아도, 강남으로, 대치동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 있어야 지금의 집중화, 양극화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박정훈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