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4년 1월 30일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에서 열린 미7공군사령관 이취임식에서 폴 러캐머라 주한미군사령관이 훈시하고 있다./연합뉴스 |
“‘같이 갑시다(Katchi Kapsida)’와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이 그저 공허한 말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지난해 12월 열린 한미연합사령관 이·취임식에서 폴 러캐머라 사령관이 이임사에서 한 말이다. 새뮤얼 파파로 미 인도태평양사령관도 “더욱 공격적인 북한의 행동, 중국·러시아·북한의 거래적 공생 관계 상황에서 ‘파이트 투나잇’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오늘 밤 적과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뜻의 ‘파이트 투나잇’은 ‘같이 갑시다’와 함께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구호다. 6·25 전쟁부터 다져온 혈맹의 가치를 상징하는 ‘같이 갑시다’에 더해, 점증하는 위협에 맞선 굳건한 대비 태세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단순 구호가 아닌 한미 동맹을 떠받치는 축이다.
그 축이 어쩌면 흔들릴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감지된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전방 부대 방문 소식을 듣고서였다. 취임 열흘째이던 지난 13일 대통령이 최전방 수색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는 모습은 믿음직스러웠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얘기가 있다. 싸워서 이기는 건 중요하지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더 중요하다. 그건 여러분 몫”이라고 했다. 이어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게 있다.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 평화를 만드는 일이다. 그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평화 안보 환경 조성이 국가 지도자의 책무인 것은 맞는다. 하지만 그런 환경은 적에 맞선 안보 태세가 굳건할 때 가능하다. 더구나 언제 적과 일촉즉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에서 복무하는 최전방 장병들 앞에서 군 통수권자가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발언하는 것이 과연 시의적절할까.
당장 싸워 이길 준비가 돼 있는 것이 가장 확실한 평화 유지책임을 알려주는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년 동안 미군 지원을 받으며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과 대적한 아프가니스탄군은 분열과 부패를 떨쳐내지 못했고, 2021년 미군 철수와 함께 전투 한 번 없이 백기를 들었다. ‘평화적 패망’의 고통은 전근대적 폭정 치하에서 신음하는 국민 몫이 됐다. 미군의 압도적 지원을 받다 반세기 전 패망한 남베트남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고, 수많은 국민이 보트피플이 돼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다.
미군이 이 나라들에서 철수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싸울 준비는커녕 분열하고 부패한 동맹에 대한 회의감도 하나의 요인이 됐음을 역사가 말해준다. 이 사례들과 견주기에 한국 국력은 전례 없이 부강하고 한미 동맹은 최고 성공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비공식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북핵,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지상군 등 우리가 마주하는 위협 또한 전례가 없다. 새 정부가 ‘같이 갑시다’ 구호의 함의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다. 평화는 힘에서 나온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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