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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행이 아니다…日 Z세대의 일상다반사가 된 '한류'[정원석의 인사이트 재팬]

중앙일보 정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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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행이 아니다…日 Z세대의 일상다반사가 된 '한류'[정원석의 인사이트 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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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석 도쿄 특파원

정원석 도쿄 특파원

부촌인 일본 도쿄 니시아자부(西麻布) 지역은 미식의 거리로 유명하다. 세련된 분위기의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닭 한 마리' 식당엔 저녁이면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내부에는 "많이 먹어" "마시자" "술꾼" "내가 건넨 쌈이 썸이 될 줄이야" 등 한국어로 쓰인 문구들이 다소 어색하지만 묘하게 한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쿄 에비스(恵比寿)의 한 식당은 가게 앞에 수조를 설치해 낙지를 넣어두고 손님이 주문하면 바로 꺼내서 '탕탕이'를 내놓는다.

가게 인테리어로 한글을 활용한 모습. 정원석 기자

가게 인테리어로 한글을 활용한 모습. 정원석 기자


이 두 가게의 점주는 모두 일본인이다. 메뉴는 한국어 발음 그대로 일본어로 써놓았다. 점원에게 어떻게 해서 탕탕이를 팔게 됐는지 묻자 "주방장이 한국에서 요리를 배워 왔다"며 "일본에선 낙지가 비교적 생소하지만 손님들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미나리는 일본에서 흔히 쓰이는 식재료는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에 관광을 왔다가 '미나리 삼겹살'을 맛본 이들이 소셜미디어(SNS)에 사진과 글을 올리기 시작하자 최근 일본에선 미나리를 내세운 삼겹살 가게들이 인기몰이하고 있다. 도쿄의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의 한 식당은 점심시간부터 대기줄이 늘어서 있었다. 1시간 대기는 기본이라고 한다. 일본어로 미나리는 '세리(セリ)'이지만, 가게를 찾은 손님마다 "미나리"라고 불렀다. 20대 여성 하세가와(長谷川)는 "한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신오쿠보를 자주 찾는다"며 "한식당에서 식사한 뒤, K-팝 아이돌 굿즈를 사러 상점을 돌아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한국식당에서 일본인 손님들이 미나리와 삼겹살을 함께 즐기고 있다. 정원석 기자

한국식당에서 일본인 손님들이 미나리와 삼겹살을 함께 즐기고 있다. 정원석 기자


신오쿠보 상권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도 잘 버텨냈다는 평가가 많다. 신주쿠 한국상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396개였던 한국 점포 수는 2022년에는 634개로 오히려 크게 늘었다. 현재는 700여개로 더 늘었다고 한다. 정재욱 상인연합회장은 "코로나19 기간 영업 제한이 풀렸지만, 한국 여행을 못 가는 일본 젊은 층이 한국에 온 듯한 기분을 내기 위해 신오쿠보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며 "폐업한 경우도 많지 않았고, 이후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임대료도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K-팝, K-드라마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음식뿐 아니라 패션으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한국 패션 브랜드들이 속속 진출하면서 번화가에서 한국 브랜드 의류를 입은 사람을 접하는 것도 흔해졌다.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디스이즈네버댓'은 코로나19 시기에 패션 성지인 도쿄 하라주쿠(原宿)로 진출했다. 당시 주변 가게들이 줄폐업하자 임대료가 낮아진 것을 기회로 과감히 일본 시장 개척에 도전한 것이었다. 2022년 10월 첫 매장을 열고 이후 오사카에 두 번째 매장을 냈는데, 진출 2년만인 지난해 일본에서 1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200억원대의 매출을 예상한다. 이 회사의 조나단 공동대표는 "(한국) 스트리트패션 브랜드들에 하라주쿠 진출은 꿈 같은 얘기였다"며 "일본에서 국제 배송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걸 보면서 매장을 내고 본격적인 해외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4월 말 도쿄 시부야(渋谷)의 떠오르는 명소인 미야시타파크(宮下パーク) 쇼핑몰에 매장을 연 '마뗑킴'도 인기몰이를 실감하고 있다. 매장을 연 첫날부터 '오픈런'이 연출됐는데, 일주일 만에 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같은 층의 유명 일본 브랜드들의 한 달 매출에 해당한다고 한다. 개점 2주 뒤 방문해보니 이미 60여 제품이 품절된 상태였다.

업계에선 한국 패션 브랜드들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일본 젊은 세대의 호감도와 관심이 높아졌다. SNS를 통해 한국 아이돌과 배우, 인플루언서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한국 패션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가 생겼다. 인터넷 검색 과정에서 '무신사' 등 한국 패션 플랫폼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현재는 일본 소비자들의 니즈를 파악해 일본어 사이트와 전용 앱을 제공하고 있을 정도다. 한국 패션 브랜드는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이른바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평이 많다.


성공 사례가 많아지면서 자신감도 커졌다. 무신사 일본법인의 브랜드 사업 매출은 2021년 대비 지난해 3년 만에 17배로 성장했다. 올해 1분기 일본 거래액이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한국 브랜드도 30여 개에 달했다. 이 중 인기 급상승 중인 '마뗑킴'은 일본 내 총판을 무신사가 맡아 사업을 확장한 경우다. 5년 안에 일본 내 전국 매장 수를 15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라고 한다. 박준모 무신사 대표는 "K-컬처가 글로벌 주류가 된 지금이 한국 브랜드의 해외 진출 최적기"라며 "조조타운(일본 최대 패션플랫폼)과 같은 전략적인 파트너를 통해 국내 브랜드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일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요코하마 팬미팅에 많은 팬들이 참석했다. 정원석 기자

지난 1일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요코하마 팬미팅에 많은 팬들이 참석했다. 정원석 기자


이뿐만 아니다. 최근에는 웹툰 등 한국 콘텐트가 성공을 거두거나, 한·일 공동 제작 애니메이션 등이 화제를 모으면서 한국문화 붐이 더 확산하는 분위기다. 지난 4월 앨범을 내고 활동을 시작한 K-팝 아이돌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활동 시작 2개월 만에 도쿄와 요코하마, 오사카를 순회하며 단독 팬미팅을 가졌을 정도다. 그때마다 일본 팬 수천 명이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겨울연가〉의 '욘사마'로 대표되는 2000년대 초반의 '1차 한류'나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2010년대 '2차 한류'와도 다른 현상이다. 이제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스며들고 있는 한국 문화가 한때의 유행에 그치는 게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일본 내에서도 커지고 있다.

도쿄=정원석 특파원 ju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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