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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달 신문에서 끔찍한 전세 사기의 새로운 방식에 대해 쓴 기사를 읽었다. 위조계약서로 법무사까지 속인 다단계 사기를 소개했는데 발품을 많이 팔고 예리하게 분석한 좋은 기사였다. 전문 사기꾼의 이름이 ‘권기태’였는데 기자가 붙인 가명이었다.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쓴웃음이 나왔다. ‘왜 이니셜을 쓰지 않을까?’ ‘범죄자 인권을 지켜주려고 내 이름이 쓰여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권기태’라는 이름으로 훌륭한 업적을 세워 유명해진 이는 없다는 것. 둘째, 유영철처럼 범죄로 악명을 떨친 이들 중에도 이 이름은 없다는 것. 셋째, 이 이름은 이번 전세 사기 일당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 하나라도 해당이 됐다면 가명으로 채택되지 않았으리라.
나는 소설가 김소진의 단편 ‘달개비꽃’에서 공장장으로 나오는 ‘기태’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생모와 헤어져 기지촌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의 고달픈 삶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고 있다. 김소진은 나와 잘 알았는데 왜 내 이름을 썼는지, 물어보려고 할 무렵에 그는 숨졌다. ‘권기태’라는 이름을 본 것은 영화 ‘파수꾼’에서였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다스리지 못해 친구와 삼각관계가 되고, 오해를 사서 아파하는 사춘기 소년의 고독한 초상이 있었다. 주인공인 그의 내면을 배우 이제훈이 잘 구현해서 이후로 나는 ‘건축학개론’ 등에 나오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살면서 ‘권기태’라는 이름을 쓰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뉴스를 읽거나 검색을 하다가 동명이인의 이야기를 보곤 한다. 노무사 학원강사 군종스님 골프감독 촬영감독 의사 등 여러 일에서 소소한 결실을 이뤄 작은 주목을 받는 모습을 보면 흐뭇해진다. 삼성전자에서는 가장 많은 이름이 남자는 ‘김동현’, 여자는 ‘김민정’이라고 한다. 회사가 커서 70, 80명이나 된다고 한다. 사보의 인터뷰를 보니 “이름이 같은 분들과 프로젝트를 하면 반갑다. 주위에서 ‘큰 동현’ ‘작은 동현’이라고 부른다. 누를 안 끼치게 더 열심히 한다”고 한다.
우리는 잘 의식하진 못하지만 동명이인이라는 무형의 공동체에서 사는 게 아닐까. 케이트 미들턴이 영국의 왕세자비가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케이트들이 좋아했을까. (잠시 자기 연민에 빠진 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다들 얼마나 걱정했을까. 김장훈이나 정혜영이 기부 왕임을 아는 또 다른 김장훈이나 정혜영은 자기 이름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질까. 비록 자기가 그만큼 선행한 것은 아니더라도 왠지 본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쓸 것 같다.
나 역시 이런 공동체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소박하더라도 선행을 하고 열심히 잘 살아서 그분들에게 공감을 주면 좋겠다. 고3일 때 다정하시던 담임선생님 성함이 문득 떠오른다. ‘김기태’ 선생님이셨다.
권기태 |
권기태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