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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통령 재판 중단, 설명은 달랑 14글자

조선일보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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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통령 재판 중단, 설명은 달랑 14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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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84조에 따른 조치입니다.”

달랑 열네 글자였다. 지난 9일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재판을 중단하면서 언론에 밝힌 이유다. 이 사건은 앞서 대법원이 유죄 취지 판결을 내린 상황이어서 특히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있었다. 재판이 계속돼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이 대통령이 직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재직 중 불소추 특권을 규정한 ‘헌법 84조’로 대통령이 되기 전 받던 재판까지 중단되는지는 선거 과정 내내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그런데 법원은 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헌법 84조 내용이 무엇인지, 왜 이를 근거로 재판을 멈춰야 하는지 설명 한 줄 없었다.

이튿날 이 대통령의 ‘대장동 재판’을 중단한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는 공지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법원 전산 시스템에 기일이 ‘추후 지정’으로 변경된 것을 보고 기자들이 묻자 “피고인 이재명 부분은 ‘헌법 84조’를 적용했다”고 답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답변이었다. 법리 해석도 없고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으니 “법원이 법이 아닌 정치적 판단을 했다” “정권 압박에 알아서 굽혔다“ 같은 비판이 나왔다.

법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친절하지도, 엄중하지도 않았다. 그저 권위적일 뿐이었다. 지난 1월 서울서부지법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만 밝혔다. 현직 대통령을 구속하는 이유를 단 열다섯 글자로 끝낸 것이다. 이에 격분한 윤 전 대통령 지지자 수백 명이 법원으로 뛰쳐 들어가 판사실을 부수는 폭동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비슷한 논란이 있었던 미국의 사법부는 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성 추문 입막음’ 사건을 담당한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은 지난 1월 트럼프 당시 당선인의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무조건적 석방’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약 7분 30초 동안 양형 취지를 설명했다. 당시 판사의 설명은 법정 녹음으로 언론과 온라인에 공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사당 폭동’ 선동 혐의 등을 수사·기소했던 잭 스미스 전 연방 특별검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1850단어로 된 ‘기소 취소 신청서’를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사법부의 존립 기반은 국민의 신뢰다. 국민을 납득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우리 법원, ‘사법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정치 권력에 짓밟히는 처지에 놓인 이유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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