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에게 바란다> 로버트 앳킨슨 정보기술혁신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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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2025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로버트 앳킨슨 itif 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장련성 기자 |
“중국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와의 기술 전쟁에서 우위를 점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할 경우,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이 될 것입니다.”
최근 방한한 로버트 앳킨슨 정보기술혁신재단(ITIF) 회장은 서울 신라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은 지금 기술 패권을 향해 국가 역량 전체를 총동원하고 있다”며 “여기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에서 ‘혁신의 리더’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지금 한국이 필요한 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능력과 문화”라고도 했다. 그에게 새 정부가 직면한 경제 상황과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해 물었다.
<1>세계 최첨단 혁신의 선두에 서고자 한다면 지금 ‘창조적 파괴’를 시작하라
-지금 한국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국이 너무 유럽식 기술 규제 모델에 깊이 몰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개인정보보호법이나 인공지능(AI) 관련 법안은 유럽연합(EU)의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이나 AI법안을 거의 그대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유럽식 규제 모델은 기술 혁신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너무 사전 규제 중심이라 스타트업이나 신기술 개발자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한국처럼 기술 역량이 뛰어난 나라가 유럽처럼 ‘위험 회피 중심’의 규제를 그대로 따르는 건 오히려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미국은 어떤가?
“한국이 ‘정부가 허락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분위기라면, 미국은 ‘일단 해보자, 정부가 하지 말라고 하면 그때 멈추자’는 문화가 지배적이다. 이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은 변화보다는 현상 유지에 더 무게를 두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 가진 걸 지키자. 위험은 피하자. 새 판은 굳이 짤 필요 없다.’ 이런 태도는 혁신을 가로막고, 더 큰 기회를 놓치게 한다. 한국이 창업 생태계나 유니콘 기업 창출 면에서 매우 저조한 성과를 내는 것도 이와 직결된 문제라고 본다.”
-AI 시대를 앞두고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은 공학 기술 중심의 수출 모델로 성공을 이뤄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소프트웨어 파워가 강해진다. 한국은 ‘혁신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많은 혁신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와의 통합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AI 분야 중 오픈AI나 딥시크가 이미 나온 거대언어모델(LMS)은 내가 한국 기업이라면 굳이 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분야는 사실상 미국과 중국이 시장을 지배할 것이고, 한국이 거기서 주도권을 잡거나 이기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I에는 LMS 외에도 농업, 물류, 법률, 지방 정부 등 많은 응용분야가 있다. 시장이 어떻게 진화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이런 실용적인 AI 활용 분야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이런 분야들까지 직접 들어올 확률은 적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강점인 조선업에 특화된 AI, 자동차 생산에 특화된 AI 등을 살리는 것도 방법이다.”
-AI 혁신을 막는 한국의 가장 큰 장벽은?
“혁신에 대한 기존 세력의 저항이다. 한 AI 법률 서비스 회사가 성장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기존 법조계의 반발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이 택시업계 반발로 우버 등 승차공유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유명한 일이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은 파괴 없이도 혁신을 잘해온 나라였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다 함께 이득을 보는 ‘보완적 혁신’을 이뤘다. 그러나 AI 시대 혁신은 ‘창조적 파괴’의 수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은 그런 파괴를 감수할 준비가 돼 있는가? 아니 한국 정치는 ‘창조적 파괴를 하자’는 분위기인가? 한국이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세계 최첨단 혁신의 선두에 서고자 한다면 지금 ‘창조적 파괴’를 시작하거나 그것이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핀테크’가 활성화되려면, 은행 일자리의 절반이 줄어들 수도 있지만, 혁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기존 산업과 구조의 변화와 저항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2>트럼프 관세정책, 동맹국들에게 상처...새 정부 ‘거래 중심 외교’로 대응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중심의 경제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캐나다 이중국적자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분노를 체감하고 있다. 현재 캐나다인이 느끼는 분노는 ‘상처받음’이다. 가깝게 지내던 상대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미국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아주 큰 실수다. 정책 수단이 관세에만 집중된 것도 문제다. 현재 미국 기업은 제조기업들은 글로벌 시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난 이번 사태가 트럼프 정부가 글로벌 공급망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과거 조지 H. W. 부시 행정부 시절 경제자문 중 한 명이 ‘감자칩이나, 컴퓨터 칩이나, 뭐가 다르냐?’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 역시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식의 문제는 미국이 장기적 전략산업 육성이나 첨단 기술 주도권 확보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새 정부는 트럼프 정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트럼프에 굽실거리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을 거다. 그건 정치적으로도 좋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양보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체면과는 별개로 실질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선 조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트럼프를 이해하고 싶다면 트럼프의 우상으로 알려진 100년 전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를 떠올려야 한다. 내 생각에 ‘트럼프주의’와 ‘매킨리주의’는 ‘미국 고립주의’라는 측면에서 매우 닮았다. NATO 문제가 대표적이다. 트럼프의 ‘거래 중심 외교’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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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2025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로버트 앳킨슨 itif 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장련성 기자 |
<3>해킹 공격은 디지털 전쟁...연합으로 가해국에 목소리 내야
-올해 초 뉴욕타임스에 쓴 ‘우리는 기술 전쟁 중이다. 그리고 중국이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는 글이 화제였다.
“미·중 뿐만 아니라 모든 선진국들의 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다. 내 생각에 중국의 목표는 모든 선진국들이 가진 첨단 제품과 서비스 생산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나는 미국보다 한국이 더 큰 위험에 처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운송비가 낮고, 중국의 전략 산업은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과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 산업이 대표적이다. 중국이 선진국과 격차를 줄여가는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빠르다. 지난해 중국은 산업용 로봇을 전 세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설치했다. 양자컴퓨팅 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 투자액 역시 전 세계 다른 모든 나라의 총합보다 더 많다.”
-정보기술(IT) 얘기로 넘어가면, 최근 한국에서는 SK텔레콤 해킹 사건이 화제였다.
“공식적이진 않지만, 중국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들었다. 중국은 기술 영역에서의 침투와 공격을 사실상 ‘작전 방식’처럼 일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다 보니 계속 반복된다. 만약 중국이 서울에 폭탄을 날렸다면, 전 세계가 들끓고 국제적인 대규모 대응이 있었을 거다. 그런데 지금 중국은 매일같이 디지털 폭탄을 날리고 있음에도, 모두가 외면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더는 용납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나는 오바마 정권에서 ‘미·중 혁신 전문가 그룹’의 책임자로 있었다. 그때 경험한 중국은 매우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국가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압박을 받으면 물러날 줄도 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물러서지 않느냐?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은 미국의 유전자 정보를 탈취했고, 미국 인사관리처(OPM)의 기밀 데이터도 훔쳤다. 심지어 민간 기술 기업들의 핵심 기술도 도둑질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들에게 실질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니 중국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왜 안 해야 하지? 걸릴 일도 없고, 손해도 없고, 리스크도 없는데.’ 이건 마치 내가 서울의 은행을 털었는데도 아무도 잡지 않고, 처벌도 안 받는 상황과 같다. 중국이 사이버 절도와 공격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을 주는 것뿐이다."
-중국에게 고통을 주기가 쉽나?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 국가주석과 사이버 공격 중단에 관한 합의를 맺은 일이 있었다. 미국이 사이버 공격의 배후로 지목된 중국 인민해방군(PLA) 소속 장교 15명을 궐석 재판으로 기소했고, 그에 대응해 중국 측이 ‘앞으로 이런 일 안 하겠다’고 약속한 거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좋다, 아주 잘됐다’며 합의를 반겼다. 그런데 미국 국가정보국(DNI)의 보고에 따르면, 그 약속은 고작 6개월 정도만 유효했다. 그들은 이미 미국의 대응 패턴을 잘 아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서는 안 된다. 연합으로 움직여야만 효과가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동맹국들이 함께 움직인다면, 한국 역시 보다 강하게 발언할 수 있을 거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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