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중앙일보 언론사 이미지

순했던 '판교 IT노조' 달라졌다, 이달만 세곳 파업 예고…왜? [팩플]

중앙일보 정용환
원문보기

순했던 '판교 IT노조' 달라졌다, 이달만 세곳 파업 예고…왜? [팩플]

서울구름많음 / 23.0 °
온건하는 평가를 받던 판교 노동조합이 180도 바뀌었다. 이달에만 세 곳이 파업을 예고하는 등 강경 투쟁 기조가 확산하고 있다.



무슨 일이야



6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카카오모빌리티와 ‘던전앤파이터’ 개발사인 네오플(넥슨 자회사) 노조는 이달 중 쟁의행위(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두 회사 노조는 지난달까지 이어진 사측과의 임금 교섭·단체협약(임단협) 협상과 이후 2~3차례의 조정에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사무용 소프트웨어 개발사 한글과컴퓨터 노조도 같은 이유로 파업을 예고했다. 실제 파업에 돌입할 경우, 세 회사 모두 창립 이래 첫 사례로 남게 된다.

2019년 4월 네이버 노동조합 '공동성명'이 영화 관람 파업을 위해 버스를 대절한 모습. 공동성명 홈페이지 캡처

2019년 4월 네이버 노동조합 '공동성명'이 영화 관람 파업을 위해 버스를 대절한 모습. 공동성명 홈페이지 캡처


그동안 IT 업계 노조는 제조업 등 다른 산업군에 비해 온건하단 평가를 받아 왔다. 2019년 4월 네이버 노조가 단행한 ‘판교 최초이자 마지막 파업’은 업무 시간인 오후 3시쯤 조합원들이 인근 영화관에 가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임단협 결과에 따라 단체행동에 나선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최근처럼 여러 노조가 잇따라 파업을 예고한 건 생소한 일이다. 업계에선 “판교 노조가 얼굴을 바꿨다”는 말까지 나온다.



노조가 화를 내는 이유



노조가 강력 투쟁을 예고한 회사들의 공통점은 지난해 사업이 잘됐다는 것. 파업을 예고한 한 노조 관계자는 “세 곳 모두 예년에 비해 올해 유독 높은 수치의 실적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카카오모빌리티의 당기순이익은 268억원으로 2023년(당기순손실 838억원) 대비 1100억원 가량 늘었다. 네오플 역시 지난해 전년(1320억원) 대비 6배 수준인 791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2023년 275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보고했던 한글과컴퓨터도 지난해엔 14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며 흑자전환했다.


네이버 노조원들이 지난달 27일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본사 로비에서 최인혁 네이버 전 최고운영책임자(COO)의 테크비즈니스 부문 대표 복귀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네이버 노조원들이 지난달 27일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본사 로비에서 최인혁 네이버 전 최고운영책임자(COO)의 테크비즈니스 부문 대표 복귀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그러나 성과에 부합하는 적절한 보상안은 내놓지 않는다는 게 노조 측의 공통된 주장이다. 네오플 노조의 경우 “사측에 ‘PS(Profit Share) 4% 제도 도입’을 요구했다. 성과 대비 합리적인 수준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직원들과 달리, 임원들의 보상은 훨씬 커졌다고 주장한다. 네오플 노조는 “지난해 주요 경영진 보상은 2023년 대비 10배 증가했다”고 주장했고, 한글과컴퓨터 노조도 “1분기 재무제표에 따르면 대표이사만 연봉이 인상돼 매월 3750만원의 급여를 받아 갔다”고 했다. 카카노 노조 ‘크루유니언’(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카카오지회) 서승욱 지회장은 “경영 상황이 안 좋던 때도 경영진에겐 큰 보상이 돌아갔다. 분배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경영진과 일반 직원들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판교 노조, ‘레벨업’?



임단협 갈등은 어느 업계, 어느 시기나 흔히 발생하기 마련이므로 단순히 ‘보상에 대한 불만’만으로 최근의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긴 부족하다는 분석도 있다. 노조 내부에선 “IT 업계 노조가 태동기를 지나 조직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네이버(1999년), 카카오(2006년) 등 한국에 큰 IT 기업이 등장한지 20여년이 지났을 뿐이고, 노조가 처음 탄생한 것도 2018년 4월(네이버 ‘공동성명’)이 처음일 정도로 역사가 길지 않다. 노조 역시 그동안은 이른바 적응기를 거쳤을 뿐이고, 이젠 협상력을 높이는 법까지 터득했다는 것이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가 3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카카오 판교아지트 앞에서 포털 서비스 '다음'을 운영하는 콘텐츠 CIC(사내독립기업)의 분사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가 3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카카오 판교아지트 앞에서 포털 서비스 '다음'을 운영하는 콘텐츠 CIC(사내독립기업)의 분사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노조 간 연대가 부쩍 잦아진 것 역시 이런 맥락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엔씨소프트 노조가 자회사 4곳의 분사 결정 철회를 요구하며 단체행동에 나섰을 때 넥슨 노조원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였고, 지난 3월 카카오의 포털 다음(Daum) 분사 소문에 반대하는 크루유니언 집회 현장에서도 네이버 노조가 힘을 실었다. 배수찬 넥슨 노조 지회장은 “같이 모이니 ‘잘 싸우는 법’을 서로 배우게 된다. 과거에 비해 노조가 성숙해졌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판교 특유의 소수 경영진 중심 의사결정 구조가 노조 강경화의 원인 중 하나라는 주장도 나온다. 분사나 경영진 영입 등의 중요 의사 결정 때마다 초기 스타트업 시절처럼 일부 경영진끼리만 모든 결정을 내리고, 직원들의 목소리는 무시한다는 시각이 노조 내부에서 커지고 있다는 것. 오세윤 네이버 노조 지회장은 “판교에 노조가 생긴지 꽤 오래됐지만 회사의 불통은 변함이 없다”며 “조합원 사이에선 ‘우리가 그간 너무 소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한 것 아닌가’하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 알면 좋은 점



노조 측은 이 같은 기조 변화를 ‘성숙’이라고 설명하지만, 회사 경영진을 비롯한 일각에선 노사 갈등의 격화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진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한 IT회사 관계자는 “그동안 경영 상황이 나쁘다고 직원 임금을 깎았던 적은 없다. 반짝 실적을 이유로 임금을 대폭 올리거나 보상 체계를 단번에 바꿀 수 없다는 걸 노조도 잘 알면서도 파업을 하겠다며 강경한 입장만 고수하는 측면이 있다”며 “어떤 영향 때문인지 IT업계 노조가 급격히 강경해지고, 이에 따라 잘 유지해온 노사 간 신뢰 역시 깨지는 것 아닐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