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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73] 여우비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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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73] 여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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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일러스트=박상훈


여우비

여우비가 온다

볕이 이렇게나 좋은데

나뭇잎 위로 여우비 온다

나뭇잎은 초록으로 빛나고

동시에 나뭇잎은 젖는다

여우비가 온다


식물성 보석이 바람에 부딪히면서 수런거린다

여우비 온다

드러난 팔뚝 위로 빗방울 맺히고


파란 핏줄이 파랗게 보이더니

이끼들이 팔을 초록으로 덮는다

닦아낼 수 없고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무지개 언덕에 여우비 온다

무지개 언덕에 비가 오면

네가 울고 있지나 않은지

네가 또 울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광물성 슬픔이 핏줄 밑으로 구른다

묻혀 있던 것이 솟구쳤다가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묻히는 것

발굴을 기다리지 않는 것

그러나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것

-장이지(1976-)

여우비는 볕이 나 있는 날에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를 일컫는다. 잠시 짧게 내린다. 강렬하지 않고 졸금졸금 내린다. 그래서 그것은 만남 같다. 누군가를 우연히 서로 만난 것만 같다. 여우비가 온 후의 풀이나 나무는 훨씬 말끔하고, 여우비가 다녀간 유월의 자연은 더욱 새뜻한 차림새다.

시인은 볕이 난 날에 빗방울이 듣는 것을 숲에서 보았던 모양이다. 나뭇잎은 볕 아래에선 초록으로 빛나고, 나뭇잎은 여우비 아래에선 젖는다. 여우비 내려 나뭇잎과 나무와 숲은 수런수런한다. “식물성 보석”은 여우비의 둥글고 맑은 빗방울을 뜻하는 듯하다. 여우비 내려 숲의 큰 나무 밑동이나 돌에 앉은 이끼는 더욱 싱그럽고, 시인은 자신의 팔 또한 그와 같은 이끼로 덮이는 상상을 한다.

이 시는 사랑의 시로도 이해된다. 시 ‘불타는 나무’에서 “바람이 오리나무를 흔들고 있다 오리나무에 떨어지는 빛을 흔들고 있다”라고 썼을 때의 그 흔들리는 빛처럼 여우비는 사랑의 부드러운 감정과 그 투명한 언어로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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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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