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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여 ‘훼방’의 깃발 아래 서자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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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여 ‘훼방’의 깃발 아래 서자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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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22일 대통령 윤석열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트럭 등을 타고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을 경찰이 막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서울 관악구 남태령고개 인근에 모여 경찰에 철수를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24년 12월22일 대통령 윤석열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트럭 등을 타고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을 경찰이 막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서울 관악구 남태령고개 인근에 모여 경찰에 철수를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정환봉 | 법조팀장



짧게 시샘하다, 오래 상심했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은 1992년생 예소연 작가가 받았다. 1990년대생의 첫 수상이다. 은희경 작가가 1998년 ‘아내의 상자’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이후 내리 7년 동안 이 상의 수상작 모음은 나의 ‘최애’ 소설집이었다. 등단의 열병을 앓았던 그때, 수상작에 이름을 올린 작가는 모조리 흠모의 상대였다. 지금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더 자주 읽고, 열병은 한숨 푹 자면 낫는 몸살이라 우길 정도로 잦아들었다. 그래도 한때 아프도록 꿈꿨던 자리에 더는 1970년대생의 몫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우주의 공허라도 끌어와 궁상을 떨고 싶을 정도로 서글픈 감정에 들게 했다. 문학상은커녕 등단도 감히 비벼보지 못할 깜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대체로 인간의 심보란 고약하기 마련이다.



고약한 심보로 예소연 작가의 수상작 ‘그 개와 혁명’을 펴 든 것은 최근이다. 입가의 미소를 손등으로 여러번 훔쳐 지우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내가 흠모했던 그 자리는 이미 그의 몫이었다. 나는 실력도, 노력도, 무람도 없이 자리를 탐하기만 했던 것이다.



소설은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아빠와 오늘을 사는 딸의 이야기다. 아빠 태수는 암에 걸렸고 주인공인 딸은 아빠를 간병한다. 아빠는 머리핀을 만드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고, 그곳에서 같은 대학 사학과 85학번 동기인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 혁명을 꿈꿨던 태수는 자기 아버지 제사에 과일 한 접시도 직접 가져다 놓는 법이 없었다.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는 유튜브를 보며 딸에게 “요즘 여자들의 생각”을 묻는다. 자신의 장례식 상주마저 딸이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딸은 태수에게 대거리할지언정 경멸하지 않는다. ‘민주85’로 불리던 시절의 아빠의 삶을 존중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 딸은 “요즘 애들은 똑딱 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다면서도 “그래도 뜻이라는 게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가방에 “환경 운동이니 페미 운동이니 그런 배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예소연 작가의 소설은 ‘꼰대’ 세대를 적대하지 않는다. 때론 대단했다 생각하고, 다만 자신의 삶을 산다. 관용은 불가역의 순간에 싹튼다.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을 때, 그 자리를 도전받을 가능성이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여유다. 그렇다. 주인공은 바뀌었고 그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필요 역시 없다.



되돌아보면 1970년대생인 나는 유시민의 말처럼 ‘배우자를 고양’시킬 정도로 ‘대단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이번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가 필요한 이유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처럼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노란 리본이나 젠더 폭력에 반대하는 보라색 배지를 가방에 단 후배들을 보면 어쩐지 뭉클했다. 서울의 밤을 이은 탄핵의 겨울, 여의도를 밝힌 응원봉을 보며 아이돌 대신 응원할 사람이 생겼다. ‘전봉준투쟁단’ 트랙터의 길을 연 ‘남태령’의 학생과 젊은 노동자와 성소수자에 콧등이 시큰했다. 계엄과 탄핵을 지나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큰 기대는 없다. 대선은 조연이 바뀌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인공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예소연 작가의 소설에서 아빠와 엄마 세대의 혁명은 피디(PD·민중민주)와 엔엘(NL·민족해방)이었다. 하지만 딸에겐 ‘훼방’이다. 대의를 핑계로 오늘의 부조리를 ‘나중 일’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구태에 맞선 훼방을 서슴지 않는 것. 그런 태도는 주인공이 아빠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결말을 스포일러 하고 싶은 고약한 심보는 참기로 한다. 다만 그 결말처럼 유쾌한 훼방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계속 이어지길 빌어본다. 나 역시 이상문학상은 언감생심이지만, 그 훼방의 조연은 탐해볼 생각이다.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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