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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이스라엘 주도 가자인도주의재단, 가자에 구호품 배포 시작

조선일보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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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이스라엘 주도 가자인도주의재단, 가자에 구호품 배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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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기존 구호 체계, 하마스에 이용”
유엔 “주민 희생만 커져…지원에 방해” 비판
가자인도주의재단(GHF)이 운영하는 한 구호품 배급소에 28일 수천명의 가자 주민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일부는 창고에까지 들어가 구호품을 마구 가져갔다./로이터 연합뉴스

가자인도주의재단(GHF)이 운영하는 한 구호품 배급소에 28일 수천명의 가자 주민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일부는 창고에까지 들어가 구호품을 마구 가져갔다./로이터 연합뉴스


이스라엘군의 재공세로 인도적 위기가 심화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두 달 반 만에 구호 물자 배급이 본격화했다. 지난 수십 년간 가자지구 지원을 도맡아 온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가 아닌,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가자인도주의재단(GHF)에 의해서다.

그러나 굶주린 주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극심한 무질서가 초래되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까지 생겼다는 보도가 나오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 지역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통제력을 약화하려면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반면, 아랍 매체들은 ‘가자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려는 속셈’이란 비판을 내놓고 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GHF는 27일부터 가자지구 남부 라파의 텔알술탄과 모라그 회랑에서 구호품 배포를 시작했다. 휴전 파기로 구호품 유입이 중단된 지난 3월 중순 이후 11주 만이다. 이날은 2023년 10월 발발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600일을 맞은 날이기도 하다.

라파 지역 세 곳, 가자 중부 한 곳 등 총 네 군데 배급소 중 먼저 준비된 두 곳의 문이 열렸다. 새 보급소는 대량의 구호품 보관 및 배포가 가능한 대형 시설로, 넓은 평지에 지어졌다. 가자의 인구 밀집 지역에 위치한 UNRWA의 보급소와 위치와 규모 면에서 차이가 크다. 또 약탈·공격에 대비해 입구를 제외한 전체를 모래 둔덕과 철조망으로 둘러싸 군 시설을 연상케 한다. 경비는 미국 민간 보안 업체가 담당한다.

하지만 첫 배급부터 GHF 보급소와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현장 영상에 따르면 배급소 정문에 몰려든 주민들은 줄이 길어지자 철조망을 넘어 무턱대고 배급소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르면서 순식간에 질서가 무너졌다. 몰려드는 인파에 놀란 보안 업체 직원들은 구호품을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주민 일부는 구호품을 쌓아둔 창고까지 들어가 마구 구호품을 가져가는 등 사실상의 약탈도 벌어졌다. 결국 이스라엘군이 헬리콥터로 경고 사격을 해 상황을 정리했다.

가자 인도주의 재단(GHF)의 구호품을 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29일 라파의 구호품 분배 센터에서 남부 가자지구의 텐트로 돌아오고 있다 /AFP 연합뉴스

가자 인도주의 재단(GHF)의 구호품을 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29일 라파의 구호품 분배 센터에서 남부 가자지구의 텐트로 돌아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튿날인 28일에는 보안 업체가 아침 일찍부터 통제에 나섰지만 오후가 되자 또 무질서 속에 군중이 구호품을 약탈하다시피 하는 상황이 재연됐다. 결국 이스라엘군이 다시 개입했다. AP와 로이터 등 외신들은 가자지구 보건 당국을 인용해 “이스라엘군의 경고 사격으로 이틀간 여러 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GHF와 이스라엘군은 그러나 “사격 때문이 아니라 군중의 무질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GHF 측은 이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라며 “주민과 직원의 안전을 위해 (구호품을 마구잡이로 가져가도록) 내버려뒀다”고 밝혔다. GHF에 따르면 28일 오후까지 약 1만5000상자, 85만끼에 해당하는 구호품이 배포됐다. 상자에는 쌀·밀가루·파스타면·콩·차·과자·담배 등이 들어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GHF 측은 “주말까지 10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주민이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엔은 그러나 GHF의 활동을 연일 비판하고 있다. 20여 년간 구축된 UNRWA의 기존 방식에 비해 효과가 크게 떨어지고, 주민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UNRWA의 배급소는 가자 지역 곳곳에 고루 분포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다. 또 각 가구가 배급 카드나 등록 번호로 관리돼 중복 수혜를 막는다. 구호품 지급량과 주기, 내용 등도 소득 수준이나 가족 수 등에 따라 조정된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GHF의 방식은 실제로 필요한 것을 주지 못하고 방해만 되는 수준”이라며 “우리는 이런 방식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그러나 “UNRWA의 구호 체계가 하마스에 의해 악용돼 왔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UNRWA 직원의 상당수가 가자 주민이다. 하마스 조직원과 친인척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하마스의 대규모 물자 유용을 조직적으로 도왔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전쟁이 발발한 뒤로는 하마스가 아예 대놓고 구호 물자를 약탈해 갔다고 이스라엘은 보고 있다. 미국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주장을 받아들여 GHF 설립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최신 분석에 따르면 가자지구 인구 약 230만 명은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고 있고, 이 중 약 47만 명은 ‘재앙적 기아’ 상태에 있다. 아랍 매체들은 이런 와중에도 굳이 구호 체계를 바꾼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알자지라는 구호소가 가자 남쪽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가자 중·북부의 주민을 남부로 내몰고, 더 나아가 (이집트) 시나이 반도로 내몰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가자 재개발’ 계획을 위한 사전 포석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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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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