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정 선생은 민주화 운동을 했다. 1970년에 박정희 독재에 맞서다 교수 자리에서 쫓겨났고, 1976년에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선언에 참여하고 잡혀갔다. 1977년에는 어용 언론을 비판하는 운동을 펼쳤다. 전두환 독재 시절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2001년에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일을 맡아, 많은 민주 인사를 사면 복권했다.
노동 운동도 했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이우정은 빈민 선교 활동에 나서 노동자의 편에 섰다. 1978년에는 동일방직 사건이 일어났다.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를 향해, 경영자 편을 드는 남성들이 사람 똥물을 붓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맞서 이우정은 동일방직 해직자 복직 대책위원회 활동을 했다. 1979년에는 와이에이치(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했다. 1980년대에도 여성 노동자와 함께 싸웠다.
여성 운동도 했다. 여성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한때 한국 정부는 외화벌이라는 구실로 한국에 온 일본 관광객의 성매매를 묵인했는데, 이 행태를 비판하며 1972년에 ‘기생관광’ 반대 운동을 폈다. 1986년에는 전두환 정권의 하수인이 여성 활동가를 성 고문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이우정은 이 사건을 파헤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했다. 1987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90년대에는 국회에 들어가 여성들의 권리를 지키는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평화 운동과 통일 운동도 했다. 1992년에는 평양에서 여성 회의를 열었다. 민간 통일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북한 여성과 일본 여성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맞서기로 했다. 1997년에는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창립하고 대표를 맡았다. 여성이 주도하는 평화 운동이었다. 1998년에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폈는데, 북한과 평화롭게 교류하자는 목소리를 시민사회 쪽에서 내는 일에 이우정이 함께했다. 2002년 5월30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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