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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신성한 나무의 씨앗’ 검은 히잡 속 세 모녀, 억압의 베일을 걷다

스포츠W 임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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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신성한 나무의 씨앗’ 검은 히잡 속 세 모녀, 억압의 베일을 걷다

서울흐림 / 20.8 °
[임가을]

[SWTV 스포츠W 임가을 기자] 한 가정의 가장인 ‘이만’은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로 승진하게 되고, 때마침 테헤란에서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 그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배급받는다. 그러나 ‘이만’이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금이 가게 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히잡 반대 시위가 시작된 이란 테헤란을 배경으로 권력 안에 속한 수사판사 ‘이만’과 그밖에 있는 세 모녀 사이에 생긴 균열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이란의 거장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이 맡았다. 이미 반체제 활동 혐의로 여러 차례 수감된 바 있는 그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망명을 선택했고, 제작 과정부터 공개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친 영화는 끝내 제77회 칸영화제에서 공식 상영되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영화는 대대적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2022년 이란 테헤란을 배경으로 한다. 히잡을 올바르게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한 여성의 의문사가 시위의 계기가 된 만큼,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탄압당하는 이란 여성의 현 상황을 중점적으로 비춘다.

사건이 벌어진 테헤란의 한복판에 놓인 주요 인물들은 가정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있지만, 세대·성별·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두 딸인 ‘레즈반’과 ‘사나’가 겪는 고충이다.


두 딸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란의 신세대 여성을 대표한다. 독재 정부의 손발이 되어 시위대를 잡아들이는 아버지 ‘이만’으로 인해 신상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레즈반과 사나는 남편과 종교에 충실한 어머니 ‘나즈메’로부터 사소한 치장부터 교우관계까지 철저히 통제당한다. 승진한 아버지를 위해 개인의 삶을 침해 당하는 두 딸의 삶은 이란 사회에서 탄압당하는 여성, 더 나아가서는 국가 체제를 위해 희생되는 이란 국민을 연상케 한다.



보수적인 집안과 사회에 갇힌 이들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건 억압을 뛰어넘은 새로운 미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 체제에 지배당한 뉴스로 거짓된 세상을 지켜보는 어머니와 달리 두 딸은 거리에 나간 시민들이 실시간으로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는 SNS로부터 가공되지 않은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고,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분노를 얻었다.

이 시점에서 감독은 두 딸이 휴대전화로 목격했을 실제 이란의 시위 현장을 그대로 담았다. 기숙사 창문을 깨 침범하고, 시민에게 산탄총을 쏘는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장면과 비명과 피가 낭자한 아스팔트 위 참혹한 풍경을 스크린 가득 비춰 이란 사회의 실상을 고발한다.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한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지는 않는다. 당장 이들이 뛰어넘어야 할 벽은 집 안에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체포당한 여성의 사례를 두고 내가 만약 저렇게 됐다면 어쩔 거냐 물으며 역지사지를 논하는 딸에게 돌아오는 것은 ‘내 딸은 저렇게 입으면 안 되지’라고 타자화하는 어머니의 답이고, 아버지는 저항하는 딸들에 대해 다 한때일 뿐이라 일축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이만과 나즈메를 무조건적인 악인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꺼림칙하게 여기던 딸의 친구가 안면에 산탄총을 맞고 오자 조심스러운 손길로 치료하는 어머니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팼고, 체제가 원하는 대로 사형집행서에 서명하는 아버지는 내내 악몽을 꾼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도 않는 수뇌부의 뜻에 따라 많은 이들이 다양한 형태로 고통받는 모습은 영화의 입체성을 더하는 것과 더불어 관객으로 하여금 한층 더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폭력을 최대한 소비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노력도 느껴졌다. 영화는 구타와 고문을 동반한 경찰의 취조를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가족 안에서 이만의 총을 숨긴 범인을 색출해 내는 과정으로 빗대어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대신 산탄총에 맞은 딸의 친구 ‘사디프’가 치료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길고 집요하게 포착해 이들이 받은 아픔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2시간 4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높은 밀도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강한 메시지를 지닌 고발 영화이지만, 동시에 용기를 낸 이들에게 전하는 찬가이기도 하다. 말미에 담긴 히잡을 불태우고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정을 안겨준다.

현재 ‘나즈메’ 역을 맡은 소헤일라 골레스타니는 테헤란 자택에 연금된 상태이며 ‘레즈반’ 역의 마흐사 로스타미와 ‘사나’ 역의 세타레 말레키, ‘사디프’ 역의 니우샤 악쉬는 가족을 남겨둔 채 이란을 탈출해 베를린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극 중 세 모녀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이야기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지닌 의미가 더욱 무거워진다.

한편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오는 6월3일 극장에서 개봉한다.[저작권자ⓒ SWTV.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