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을 끼고 있는 작은 항구 궁리항 풍경. |
52년을 살아오며, 그리고 30년 가까이 여행을 하며 내가 깨달은 유일한 진실은 ‘삶은 여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절대, 절대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몸소 체득한 삶의 진리다. 그래서일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실제로도 지난 5년간 내게 일어났던 일들 중 단 하나도 내가 예상했던 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한다. 불행은 언제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오니까, 오늘 즐길 수 있는 건 오늘 즐기려고 노력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가장 먼 미래는 십수년 후의 내 노후가 아니라 ‘올겨울에 치앙마이에 다시 가야지’ 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충남 홍성 여행 지도. 성기령 기자 |
지금은 충남 홍성 남당항에 있는 어느 카페에 앉아 창밖에 펼쳐지는 해무 가득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남당항에 비틀스를 테마로 한 이색적인 카페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오늘 새벽차를 몰아 도착했다. 수산물 직판장이 일렬로 늘어선 포구에 자리한 비틀스 감성의 카페라니! 도대체 어떤 곳일까, 궁금해 차를 몰았던 것이다. 갑자기 불행이라는 놈이 찾아와 나를 주저앉힌다면,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지 못한 걸 후회할 게 분명했으니까.
카페는 오전 11시에 문을 여는데, 내가 홍성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였다. ‘너무 일찍 도착했군.’ 그래도 꽉 막히는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덧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 ‘일찍 도착하는 것은 늦게 도착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 그곳이 비록 지옥일지라도.’ 내 여행의 신념 가운데 하나다. ‘여행작가가 가볼 만한 곳은 분명히 있다. 그곳이 비록 지옥일지라도.’ 내 여행의 또 다른 신념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영험한 물건이 있으니, 주변 여행지를 찾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성곽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홍주읍성’. |
홍주읍성 투어의 관문은 홍화문이다. 날씨 좋을 때 홍화문에선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들이 친구처럼 말을 건다. |
‘홍주읍성’ 안에 있는 정자. |
홍성읍내에 들어서서 잠깐 차를 대고 스마트폰을 검색해보니 홍성에는 ‘홍주읍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궁리항과 남당항도 홍성에 있었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홍성에 속한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홍성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자, 일단 홍주읍성으로 가자. 홍성에 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어도 여행하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는 시대니까.
홍주읍성 앞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성벽 앞에 서니 생각했던 것보다 아담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단단하게 보였다. ‘함락하기가 쉽지 않겠어.’ 내가 적장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성은 조선 세종 때 길이 약 1700m 규모로 지어졌는데, 지금은 이 중 돌로 쌓은 성벽 일부분만 남았다. 약 800m 길이다. 왜구의 침입을 예상하고 지었다고 하는데, 그 설명을 보고는 놀라움이 일었다. ‘왜구가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거잖아.’ 하긴 홍성은 내포 지방의 일부다. ‘내포’(內浦)는 말 그대로 ‘안쪽의 포구’ 또는 ‘안으로 들어온 바닷길’이라는 뜻. 여기까지 배가 왔다는 것이니 왜구가 올 만도 했구나 싶었다.
‘홍주읍성’ 안에 있는 옛 감옥 모습. |
‘홍주읍성’ 안에 있는 옛 감옥 모습. |
성내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이었다. 굵은 나무 창살 안에는 목에 칼을 쓴 죄수의 모습도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감옥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순교자들이 고문과 처형을 당한 장소기도 했다. 감옥을 지나 조금만 걸어가면 ‘홍화문’에 닿는데, 여기서 홍성 읍내가 내려다보인다.
홍주읍성을 나와 큰 도로를 건너면 ‘홍성 명동거리’다. ‘명동’은 서울의 명동처럼 번화한 상권을 지칭하는 비공식 명칭인데 1970년대부터 홍성의 중심 상권이었던 곳이다. 지금도 분식집과 잡화점, 노래방, 그리고 오래된 의상실 등 토박이 가게들이 남아 있다.
명동을 지나면 ‘홍성전통시장’과 ‘홍성상설시장’이다. 새벽부터 부산을 떤다고 계속 굶었던 터라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을 먹고 궁리항으로 향했다. 홍성에는 궁리항과 남당항이라는 예쁜 포구 두곳이 있는데, 지도 앱으로 보니 궁리항과 남당항을 거쳐 광천 쪽으로 가서 고속도로에 오르면 될 것 같았다.
궁리항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천수만을 끼고 있는 작은 항구인데, 조용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있다. 포구 앞 갯벌에서는 짠 소금과 진흙 냄새가 올라왔다. 그래도 바다에 왔으니 뭐라도 하자 싶어 방파제 끝에 있는 등대까지 걸어가 사진을 찍었다.
‘홍성 명동거리’ 풍경. |
궁리항에 있는 등대. |
남당항으로 가는데 전망대 같은 건물이 보여 검색해보니 홍성 스카이타워라는 설명이 보였다. 높이는 65m 된다고 한다. ‘도대체 이걸 왜 만들었을까?’ 전망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65m 위에 올라가 뿌연 유리창 너머로 보는 바다는 어떤 감흥으로 다가올까.
스카이타워를 지나 도착한 남당항.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페퍼상사’라는 카페로 왔다. 페퍼상사라는 이름은 아마도, 아니 분명하게 비틀스의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에서 따와 지었으리라. 들어서는 순간 ‘히어 컴스 더 선’이 흘러나왔다. 이런 공교로움이라니, 이런 우연이 여행이 아닐까.
나는 지금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잔잔하다. 어느새 곡은 ‘더 롱 앤드 와인딩 로드’로 바뀌었다. 길고 구불구불한 인생의 길, 아직도 내겐 이런 길이 많이 남아 있을까. 그렇다면 부디 험하지는 않길.
궁리항 풍경. |
집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나이 쉰둘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할 기회가 생겼고, 눈 딱 감고 그 일을 해보기로 용기를 냈다. 2~3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많이 두렵다. 그래도 뭐,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멋있게 해치우고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 방을 잡고는 보름 정도 맥주나 마시자, 이렇게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가는 길에는 ‘헤이 주드’를 듣자. “헤이 주드, 돈트 비 어프레이드, 유 워 메이드 투 고 아웃 앤드 겟 허~”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페퍼상사’ 외관. |
B급 음식
홍성전통시장 주변에는 유독 소머리국밥집이 많다. 알고 보니 홍성은 충남에서 소 사육 두수가 제일 많고, 현대화된 도축장과 축산물도매시장이 가까이 있어 소머리 등 소 부속물을 구하기 쉬워 소머리국밥집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내가 소머리국밥을 먹은 곳은 ‘70년소머리국밥’(041-633-1240)이다. 이름보다 역사가 깊은 80년 전통을 자랑한다. 한우 소머리와 양지를 푹 고아 낸 국물은 진하면서도 깊은 맛을 자랑한다. 얼큰한 맛(빨간 국물)과 맑은 맛(하얀 국물) 두가지 중에서 고를 수 있는데 나는 맑은 맛을 먹었다. 기본이 얼큰한 맛이라 하얀 국물을 원한다면 주문할 때 미리 이야기해야 한다.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 있다. 시원한 깍두기도 국물과 궁합이 잘 맞는다. ‘홍흥집’(041-633-0024)도 소머리국밥으로 유명하다. 돼지내장탕도 현지인들이 많이 먹는데 냄새가 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70년소머리국밥’의 음식. |
지방에 가면 중국집을 검색해보고 가보려고 한다. 뭐라고 할까, 시골에는 아직 짜장면과 볶음밥을 꽤 괜찮게 하는 집이 있다. 아무래도 현지인의 입맛을 맞추다 보니 옛날 그대로의 맛을 지키고 있지 않나 싶다(순전히 내 생각이다). 광천읍에 위치한 ‘봉래각’(041-641-3904)은 홍성군청에 영업신고를 한 연도가 1976년이다. 벽에 영업신고증이 붙어 있다. 주인장에 따르면 대를 이어 90년째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확신할 수 없다. 아무튼 짬뽕과 볶음밥을 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내가 들어갔을 때도 가족 단위 손님이 볶음밥과 짬뽕,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혼자 온 할아버지는 짜장면을 천천히 드시고 있었다. 나는 볶음밥을 시켰는데, 내 옆자리에 앉으신 어르신 세분이 탕수육을 나눠 주셨다. 볶음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밥은 수분을 날려 고슬고슬하게 볶아 씹는 맛이 좋았다. 혀 위에서 밥알이 살살 굴렀다. 기름에 튀긴 듯한 계란프라이도 당당하게 올라가 있었다. 짬뽕 국물이 아니라 달걀국을 함께 내줘서 더 좋았다.
‘봉래각’ 음식. |
‘페퍼상사’에서 맛 볼 수 있는 음료. |
‘페퍼상사’(041-633-0625)는 영국 록 밴드 ‘비틀스’로 가득한 곳이다. 카페 내부 곳곳에는 비틀스 음반과 포스터, 피겨 등이 있다. 마치 영국 리버풀 카페에 온 것 같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카페로 꾸몄다. 내가 주문한 건 드립커피(에티오피아 모모라)와 에그타르트. 커피는 향이 좋았고, 에그타르트는 바깥 빵 부분은 바삭했고, 안쪽 달걀 크림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이곳의 시그니처 음료는 ‘페퍼상사커피’인데, 일반 커피보다 진하다. 여행객들은 크림라테도 많이 마시는 모양이다. 주말에는 웨이팅이 있는 편이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