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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의 정치화와 재판독립 원칙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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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의 정치화와 재판독립 원칙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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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준비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준비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지난 1일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이재명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의미한다. 이하 ‘5·1 대법 전합 재판’)은 ‘정치의 사법화’의 전형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법의 정치화’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난감하고도 충격적이다.



정치적 분쟁의 사법화는 선출된 권력(국회, 대통령)의 민주주의 훼손 시도를 주권자의 총의가 담긴 헌법을 통해 통제하고 민주주의를 복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을 선언하고 대통령을 파면시킨 것이 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명쾌함이 정치적 분쟁의 사법화에 언제나 적용되지는 않는다. 모든 정치적 분쟁이 12·3 비상계엄 사태처럼 ‘선출된 권력의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배신’에 해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위 의료 개혁 사태처럼 다양한 방식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정치 문제가 사법으로 넘어오게 되면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질문이 ‘적법하냐, 위법하냐’의 일도양단식의 질문으로 변질된다. 공직선거법의 경우, 사법부가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을 선택하면 당선이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보자 적격이 박탈된다. 그 결과 마치 사법이 정책적 결정을 하거나 선거를 좌지우지하는 것 같은 상황이 초래되는데, 이때 사법통치 우려를 동반하는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딜레마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정치의 사법화 국면에서 대부분의 판사들은 억울하다. 정치적 문제를 사법으로 넘긴 것은 판사가 아니며, 재판에 온 이상 판사들은 어떠한 판단이든 내놓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열심히 재판을 했건, 얼마나 고심하여 판결문을 작성했건 간에 결론에 따라 어느 한 쪽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정치판사가 정치적 재판을 했다’는 비난을 듣다 보면 판사들은 욕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기존 정치의 사법화 담론을 살펴보면, 정치 문제의 사법적 판단 문제가 대두하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준수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법적 판단만을 내렸는데 결과적으로 그 판단이 정치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만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법부가 적극적으로 정책 결정을 하여 비민주적인 통치 권력이 되고자 하는 상황, 즉 정치의 사법화로 인한 ‘사법의 정치화’를 주요한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우리나라의 판사들은 전자의 관점에서 억울함을 느끼는데, 이는 판사들 스스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법이 정책 판단에 나아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법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이 재판을 수단삼아 적극적으로 국가 통치에 관여하려고 했던 사태가 드러나자 판사들이 강하게 반발했던 이유도 이러한 경향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사법화가 문제로 등장했지만 사법의 정치화까지 우려할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의 사법화가 극심해져 사법의 정치화까지 의심받는 상황에서 사법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신뢰받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결론만으로는 사법의 정치화 우려를 불식시키기 어렵다면 판사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절차적 정당성과 충실한 심리, 즉 재판의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5·1 대법 전합 재판은 문제적이다. 공직선거법 사안은 그 자체로 정치의 사법화 문제를 내포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거센 충돌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어떠한 재판을 했는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빠른 재판을 해서 원심을 파기했다. 반대 의견을 쓴 대법관들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요체는 서로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대법관들 상호 간의 설득과 숙고에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강조한 뒤 이 재판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요체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점을 폭로했다.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되다 못해 대법관들의 설득과 숙고에 필요한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재판, 신속성이란 가치 아래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의 본질을 포기한 재판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례성과 전격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무엇이 급했기에 재판의 본질과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해야 했는가. 그러한 재판을 생중계한 이유는 무엇인가. 5·1 대법 전합 재판만으로는 이재명 후보자의 피선거권이 박탈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력 대선 후보의 법적 자격 문제를 정리해주기 위해 서둘렀다는 해명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법이 대선 국면에 중대한 변수를 던지기 위해 절차적 정당성과 심리의 충실성을 포기했다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다. 나로서는 재판의 한계가 삭제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재판의 신속성은 재판의 충실성을 전제로 하는데, 재판에 관여한 대법관들 중 일부가 재판의 충실성을 부정하는 재판을 어떤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법의 정치화를 의심하는 분노가 당해 재판의 간접적 이해당사자인 야당을 통해 대법원장 특검 및 탄핵 시도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자 판사들은 야당의 시도가 재판독립 원칙을 침해한다고 맞선다. 재판독립 원칙은 사법의 헌법적 책무, 즉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력을 통제하고 기본권을 보장하는 책무를 수행하고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칙이다. 개별 재판을 이유로 한 수사 및 탄핵 시도는 재판독립 원칙을 침해할 우려가 크다. 그러나 정작 사법이 정치화되어 비민주적 통치 권력으로 나서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가 재판독립 원칙을 보장해주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재판독립 원칙이 ‘우리가 어떠한 재판을 하더라도 사회는 이를 수용하여야 하고 이에 대한 개입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내용이 아니라면, 이 국면에서 나를 포함한 판사들은 우선 5·1 대법 전합 재판의 이례성과 전격성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위 재판이 ‘통상적인 개별 재판’에 불과한지, 아니면 사법의 정치화 우려를 부른 문제적 재판에 해당하는지, 후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자성하고 책임질 것인지 논의하여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재판독립 원칙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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