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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494] 난파선과 구경꾼

조선일보 조용헌 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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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494] 난파선과 구경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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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에 먹는 생선이 민어다. 민어는 잡아서 바로 먹는 것보다 냉장고에서 며칠 숙성시켰다가 먹어야 맛이 우러난다.

독서도 그럴 때가 있다. 책을 구입하고 나서 바로 읽지 않고 3~4년 지난 다음에 읽어보니까 맛이 나는 책이 있다.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책이었다. 독일의 한스 블루멘베르크(1920~1996)가 쓴 책이다. 저자는 유대인 혈통 때문에 수용소 생활도 했고 나치를 피해 남의 집 지하실에서 몇 년간 숨어 살며 독서만 하고 살았던 경험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에 될 수 있으면 안 나가고 철저히 구경꾼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철학이었다. 세상은 난파선과 같다. 배에다가 돈 되는 상품을 싣고 먼바다로 장사하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어 있다. 폭풍우 속에서 배가 난파하여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러니까 난파당할 배에 타지 않아야 한다. 안전한 산 위에서 난파당하는 배를 바라다보는 것이 철학자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바다에 나가 배를 타는가? 욕망이라고 보았다. 배는 돈과 명성, 출세,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욕구를 의미한다. 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폭풍우를 무릅쓰고 배를 탄다.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는 안전한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그 욕망의 배가 난파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존재이다. 대신 철학자는 배에 실린 선상화물(船上貨物)로부터 이득을 볼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안전의 대가는 돈 없이 소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좀 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에서 구경꾼은 존재할 수 없다. 예외는 없다. ‘누구나 배에 이미 승선해 있다’는 파스칼의 주장을 저자는 소개하기도 한다.

필자처럼 칼럼을 쓰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칼럼니스트는 한편으로 난파당하는 배를 언덕에서 바라다보는 구경꾼의 입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칼럼 쓰는 일은 세상과 밀접하게 엮이는 업종이기도 하다. 제자백가 중에서 불가(佛家)와 도가(道家)는 난파당하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난세의 철학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그런 뜻이다. ‘陵’은 큰 언덕이다. 병장기를 차단해주는 언덕이 가로막고 있는 복숭아 꽃밭이다.

10대 중반에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 갔다가 얼떨결에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던 서산대사. 그는 청허휴정(淸虛休靜)이라는 고즈넉한 법명을 가졌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전쟁터에서 승병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을 맡아야 하는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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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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