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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남아공 대통령에도 ‘모욕 외교’... 준비 안 하면 당한다

조선일보 워싱턴=박국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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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남아공 대통령에도 ‘모욕 외교’... 준비 안 하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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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1일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1일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1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대통령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차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나란히 앉았다. 라마포사는 골프광 트럼프의 환심을 얻기 위해 남아공의 골프 스타 어니 엘스와 레티프 구센을 배석시키고 경제 협력과 관세 논의 등을 논의할 참이었다. 트럼프가 이들을 보고 “위대하고 훌륭한 골퍼들”이라고 반기는 등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돌연 “불을 꺼달라”고 말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어두운 극장처럼 변한 회담장에서 대형 화면에 영상이 재생됐다. 남아공의 흑인 급진 좌파 정치인 줄리어스 말레마가 수만 명이 운집한 집회에서 “‘보어인(네덜란드 이주민)을 죽이고 농장주들을 죽이자”고 외쳤다. 도로 양쪽 벌판으로 하얀 십자가가 일렬로 묻혀 있는 장면도 나왔다. 트럼프는 “백인 농장주들의 묘지”라며 “백인 농장주들이 학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트럼프는 1월 취임 후부터 줄곧 남아공 정부가 소수 백인 농장주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백인 농장주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해왔다. 이를 이유로 남아공이 올해 의장국인 G20(20국)에서의 미국 활동을 중단하고, 대외 원조도 끊었으며, 이를 비판하는 주미 남아공 대사까지 추방했다. 그리고 ‘시청각 자료’까지 준비해서 정상회담 의제로 불쑥 꺼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라마포사의 얼굴에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라마포사는 참모진과 심각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트럼프에게 “이 영상이 어디서 촬영됐는지 나도 알고 싶다. 처음 본다”고 했다. 트럼프는 “남아공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맞받았다.라마포사는 두 손을 휘저으며 해명에 주력했다. “(백인 농장주를 살해하는 건) 우리 정부 정책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이며 이런 발언은 극소수 야당 인사들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대부분의 살인 피해자는 흑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굳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미리 출력해 온 수십 개의 기사 뭉치들을 꺼내 하나씩 라마포사에게 들어 보이며 “죽음, 죽음, 끔찍한 죽음이다. 백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죽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 사안을 언급하면서 ‘화이트 제노사이드’라는 단어까지 썼다. 홀로코스트(2차 세계대전), 르완다(1994년), 보스니아(1995년) 등 반인류적 범죄로 지탄받는 대학살에 등장하는 단어인 ‘제노사이드’라는 단어까지 꺼내든 것이다. 트럼프는 라마포사를 몰아붙이면서 방송 화면과 기사 뭉치 외에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CNN은 “유엔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조건은 특정 집단을 박멸할 목적으로 진행되는 살상 행위”라며 “해마다 남아공에서 벌어지는 전체 살인 사건 중 농장에서 벌어지는 경우의 비중은 극소수이고, 남아공 농무장관은 백인”이라며 트럼프의 주장을 반박했다.

스물두 살이던 1974년 반(反)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차별) 투쟁에 투신해 노조위원장과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에 오른 라마포사는 인종차별 종식을 이끈 국가 영웅 고(故)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다. 백전노장 정치인인 그가 생중계된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로부터 흑인이 백인을 겨냥해 자행하는 역인종차별을 방조하는 무책임한 국가 지도자로 지탄받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주요 외신들은 “라마포사가 트럼프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ambushed)”고 했다.

미 언론은 지난 2월 백악관을 찾아왔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종전 해법을 두고 트럼프와 이견을 보이다 면박당하고 사실상 쫓겨났던 장면을 소환하며 ‘더욱 정교하게 준비된 외교적 기습’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직접 장면을 세세하게 구성했다고 알려졌다. 평소 집무실에 없던 대형 TV를 설치해 영상을 준비하고, 기사 뭉치를 미리 출력해 이를 카메라 앞에서 들어 보이는 등 ‘예행 연습’까지 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사업가 시절 TV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방송 감각을 외교 무대로 옮겨 ‘특수 효과’까지 준비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남아공 정상까지 백악관 정상회담 자리에서 트럼프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런 방식이 트럼프 정상 외교의 패턴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특히 과거 미국에 비판적 행보를 보였던 국가 정상일수록 불의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터넷 매체 액시오스는 “이제 트럼프의 백악관은 세계 정상들에게 위험 구역이 됐다”며 “백악관 방문은 더 이상 우호와 신뢰를 쌓는 기회만이 아니라 기습 공격의 위험도 동반된다”고 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착민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뜻으로 1948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공에서 시행된 흑백 인종차별 정책을 통칭한다. 이 기간 거주지·교육·의료·혼인까지 철저히 인종별로 분리됐으며 흑인 참정권도 제한됐다. 남아공은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올림픽 출전 금지 등 각종 제재를 받았다. 1990년 백인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 대통령이 철폐 방침을 밝히며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고, 1994년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공식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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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박국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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