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뉴스1 |
"정부 재정적자와 부채 전망이 국채시장을 끌어내리고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전 세계 주요국의 장기국채 금리 급등 현상에 대한 미국 경제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의 21일(현지시간) 분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촉발한 인플레이션 악화 우려와 각국의 재정 확대 정책이 맞물리면서 투자자들이 금과 함께 '안전자산 중의 안전자산'으로 여겨 투자해온 미국 장기국채마저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자거래 플랫폼 트레이드웹에 따르면 이날 미국 채권시장에서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전장보다 12.3bp(0.123%포인트) 오른 5.092%로 2023년 10월 말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그동안 30년물 금리의 '심리적 저항선'으로 통용됐던 5%선이 이달 들어서만 40bp 이상 오른 상승세에 순식간에 뚫렸다. 글로벌 채권 금리의 벤치마크로 통하는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도 이날 4.599%까지 치솟으면서 지난 2월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블룸버그는 10년물 국채 금리가 5%까지 오를 가능성도 거론된다고 보도했다.
미국 30년물 국채수익률 올들어 추이/그래픽=이지혜 |
채권금리(수익률)가 올랐다는 것은 반대로 채권가격이 떨어졌다는 의미다. 채권 가격은 만기에 보장하는 금리를 유통·거래 금리로 깎아서 결정하기 때문에 유통·거래 금리가 오를수록 가격은 떨어진다. 쉽게 말해 살 사람이 줄어드니 이자금리를 더 높게 제공하는 거래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시장에서 유통·거래되는 국채뿐 아니라 새로 발행되는 국채 가치도 뚝 떨어졌다. 이날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60억달러(약 22조원) 규모의 20년물 국채 금리는 5.047%로 결정됐다. 지난달 발행한 같은 만기 국채보다 금리가 0.237%포인트 올랐다. 2023년 10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날 국채 경매 응찰률이 2.46배로 직전 6차례 평균(2.57배)을 크게 밑돈 결과다.
국채시장 약세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국채 30년물 금리는 한달 반 만에 5.5%대로 치솟았고 독일도 3.1%대 후반까지 올랐다. 일본 국채 30년물과 40년물 금리는 전날에 이어 22일에도 나란히 장중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 20년물 국채수익률 올들어 추이/그래픽=윤선정 |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대규모 감세법안은 이런 와중에 국채 금리 급등의 방아쇠를 당겼다. 감세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시행될 경우 정부 재정적자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메우기 위해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 국채 가격이 하락(금리 상승)할 수밖에 없다. 미 의회 합동조세위원회는 감세법안이 시행될 경우 10년 동안 정부 재정적자가 2조5000억달러(약 3440조원) 이상 늘어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 강경파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있을 정도로 논란이 적잖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퇴출해야 한다고 압박하면서 오는 26일부터 의회가 메모리얼 데이 휴회에 들어가기 전에 하원 통과를 노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최근 재정 확대 논쟁이 한창이다.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당을 중심으로 소비세 감세 주장이 터져나온 가운데 반대 입장을 당론으로 정한 집권 자민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제기된다. 유럽에서는 관세전쟁 등으로 사이가 틀어진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국방비 증액 논의로 이어지면서 재정 부담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재점화할 조짐도 주요국의 채권 금리 급등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국에서는 5월 들어 고용통계 등 주요 경제지표가 시장 예상을 웃돌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해 금리인하 횟수를 당초 예상됐던 2회에서 1회로 줄일 수 있다는 전망이 고개를 든다. 연준이 트럼프 관세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박을 고려해 금리인하에 더 신중해질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유럽에서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유럽중앙은행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에서 금리인하에 신중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발표된 영국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5% 상승해 1년 3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주요국의 채권금리 상승이 지속될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의 새로운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와 기업의 부담이 커지면서 설비투자가 위축되고 부채가 많은 기업들은 파산할 수 있다. 대량의 국채를 보유한 금융사의 부담이 커질 경우 금융시장이 혼란을 겪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닛케이는 "미국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면 일본과 유럽 등으로 이동해 해당 지역의 금리가 하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일본과 유럽에서도 인플레이션과 재정 악화 우려가 동시에 확산하면서 투자금이 갈 곳을 잃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뉴욕=심재현 특파원 urme@mt.co.kr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