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AI는 담지 못하는… 종이와 연필로 그린 미야자키의 ‘마법’

조선일보 백수진 기자
원문보기

AI는 담지 못하는… 종이와 연필로 그린 미야자키의 ‘마법’

서울흐림 / 21.3 °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 40주년
미야자키 다큐 영화 28일 개봉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환상적인 캐릭터들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웃집 토토로’ 속 숲의 정령 토토로는 천년을 넘게 사는 신령스러운 녹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대원미디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환상적인 캐릭터들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웃집 토토로’ 속 숲의 정령 토토로는 천년을 넘게 사는 신령스러운 녹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대원미디어


“종이와 연필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시대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2014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84)는 이 같은 소감을 남겼다. 최근 챗GPT로 지브리풍 이미지 만들기가 유행하자, 지브리 스튜디오 창립자인 미야자키 감독의 반응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미야자키의 긴 답변처럼 느껴진다. AI가 지브리풍 그림을 수억 장 찍어내더라도, 인간의 고뇌와 헌신을 흉내 낼 순 없다.

경비행기를 타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습. ‘지브리’라는 이름도 자신이 좋아하던 비행기 이름에서 따왔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경비행기를 타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습. ‘지브리’라는 이름도 자신이 좋아하던 비행기 이름에서 따왔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 4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이 28일 국내 개봉한다. 1985년 미야자키가 설립한 지브리 스튜디오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켰다. 영화는 50년 넘는 세월 동안 종이와 연필로 마법 같은 세계를 만들어 온 미야자키의 삶과 철학을 조명한다. 화려한 빨간색 3륜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고, 자신의 손끝에서 나온 캐릭터를 보고 소년처럼 킬킬 웃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같다.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지브리 대표작의 탄생과 제작에 얽힌 비하인드가 공개된다. 1979년 첫 장편 애니메이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으로 수억 엔 적자를 내고, 미야자키는 흥행에 실패한 감독으로 낙인찍혔다. 누구도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만화 잡지 편집자이자 훗날 지브리 스튜디오 대표가 되는 스즈키 도시오가 찾아왔다. “일상과 동떨어진 위대한 서사를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것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만화는 13년에 걸쳐 연재되며 사랑을 받았고, 극장판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의 발판이 됐다.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난 미야자키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꾸준히 반전과 평화, 환경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자연과 환경의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돌아본다. 미나마타 수은 중독 사건의 영향을 받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오염으로 고통받는 세계를 그렸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오물로 뒤덮인 강의 신을 목욕시키는 장면은 지역 하천 정화 활동에 참여했던 경험이 반영됐다.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다큐멘터리에서 미야자키는 “우리는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격려하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는 어디로 향하는가’ ‘인간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격려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미야자키 감독은 애니메이션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수만 장의 그림을 그린다. 다큐멘터리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는 앞치마를 하고 사무실 구석에 앉아 연필을 쥐고 종이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손으로 그리고 채색한 여러 장의 그림을 조금씩 움직여 만드는 셀 애니메이션처럼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AI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21세기는 불확실한 시대예요.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인류와 문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요.”

[백수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