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형률씨의 영정사진으로 사용된 20대 때 모습. ‘한국원폭2세 환우회’ 제공 |
“원폭 피폭후유증의 대물림 문제를 개인에게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함을 넘어 인권유린 행위입니다. 원폭과 유전의 관련성 증명은 개인이 아닌 국가와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이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반핵평화운동가 김형률씨는 2005년 5월29일, 고작 35살 나이에 숨졌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피폭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
‘한국원폭2세 환우회’ 등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고인의 20주기를 앞두고 오는 24일 오후 2시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근처에 있는 김형률추모비에 헌화할 예정이다.
일제강점기 합천군에서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사람 대부분은 히로시마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1945년 8월6일 미군이 떨어뜨린 원자폭탄에 피폭됐다. 경남 합천군은 국내에서 원폭 피해자가 가장 많아서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김씨 어머니 역시 합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 히로시마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귀국했다.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씨는 어려서부터 폐질환과 빈혈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그의 쌍둥이 동생은 태어나서 1년6개월 만에 폐렴으로 숨졌다. 김씨는 2002년 자신의 병이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병은 백혈구 이상으로 면역체계가 약해지는 희귀 난치병이다.
그는 2002년 3월22일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피폭 후유증을 앓는 원폭 피해자 2세라고 공개적으로 밝혀, 원폭 피해는 피폭되지 않은 후손에게까지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에 처음 알렸다. 그는 자신의 병이 단순히 개인의 아픔이 아닌 전쟁과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핵의 야만성을 고발했다. 이후 원인을 알 수 없는 희소병을 앓던 원폭 피해자 2세들이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는 원폭 피해자 2세들의 단체인 ‘한국원폭2세 환우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며,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 등 반핵평화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그가 숨지고 11년이나 지난 2016년 5월19일에야 제정됐다. 그러나 이 법은 피해자 범위를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당사자와 당시 태아였던 사람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2세 등 원폭 피해자 후손까지 피해자에 포함해서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질 당시 한국인 피폭자 7만여명 가운데 4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방 이후 생존자 2만3천여명이 귀국했는데, 80년 세월이 흐르며 20일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국내 원폭 피해 생존자는 남성 615명, 여성 980명 등 1595명에 불과하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84.8살에 이르렀다. 이들의 자녀인 원폭 피해자 2세는 현황 파악조차 되지 않는데, 한국원폭2세 환우회 회원은 1300여명에 이른다.
한정순 ‘한국원폭2세 환우회’ 회장은 “어느덧 피폭 80년이 되었지만, 반핵평화의 울림은 계속되고 있다. 핵 없는 세상을 외치며 꽃잎처럼 스러져간 그는 돌아오지 않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반핵평화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며 “아름다운 청년 김형률에 대한 그리움은 희망으로 함께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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