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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만에 돌아온 ‘헤다’ 이혜영, 젊은 관객에게 직접 전하는 클래식의 미학

스포츠W 임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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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만에 돌아온 ‘헤다’ 이혜영, 젊은 관객에게 직접 전하는 클래식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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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가을]

[SWTV 스포츠W 임가을 기자] 13년 만에 돌아온 ‘헤다 가블러’로 돌아온 이혜영이 클래식의 미학을 전한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중구 소재의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헤다 가블러’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자리에는 박정희 연출과 ‘헤다 가블러’ 역을 맡은 이혜영이 참석했다.



‘헤다 가블러’는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간한 희곡으로,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이자 자신의 성인 ‘가블러’를 붙인 채 살아가는 여주인공 ‘헤다’를 앞세워 남성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적인 여성의 주체를 과감히 천명했다.

국립극단은 지난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내 프로 무대로서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올려 전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당시 주역 ‘헤다’를 연기한 이혜영은 제5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연기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13년 만에 ‘헤다 가블러’로 다시 만난 박정희 연출과 이혜영은 서로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

이혜영은 “박정희 연출은 연출가라기보다는 창조인”이라면서, “초연에 부족한 게 있었다면 완성을 하기 위해서 만난 거다. 모든 걸 해체하고 새롭게 만드시느라 애를 많이 쓰셨고,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 연출은 “연출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배우들이 많지는 않은데 간혹 있다. 이혜영이라는 배우가 그런 배우”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극 중 한 장면에서 대사를 다 삭제하고 연기로 해보자고 했을 때 본인 스스로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걸 보면서 감탄했다. 이혜영 배우는 물론 독보적인 매력이 있는 배우고 ‘넘사벽’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번에 한 번 더 놀란 건 그때보다 더 지성적으로 성숙되어있었고 좀 더 깊이가 생겼다. 창작진들의 상상을 뛰어넘어 창출해 내는 배우라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이번 작품은 박정희 연출의 국립극단 예술감독 부임 이후 첫 데뷔작이자 초연 이후 관객의 상연 요청이 지속적으로 쇄도한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국립극단의 신규 사업 ‘Pick 시리즈’를 개시하는 첫 작품이다.

직접 초연을 올렸던 작품을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써 다시 만난 박 연출은 “꾸준히 ‘헤다 가블러’를 다시 보고 싶다는 관객들의 요청이 있었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게 국립극단으로서의 방향에 대한 상징성이 있는 것”이라면서, “관객들이 선호하고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을 하겠다는 저희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초연 때 ‘헤다’ 역을 맡아 관객과 평론의 호평을 받았던 이혜영은 “그 해 좋은 평을 얻었고 상도 받았지만 이번에 박 연출님이 다시 한번 해보자고 할 때 지난날을 생각하니까 너무 부족했었던 것 같았다”면서, “완성을 위해 다시 한번 도전하자는 생각”이라 밝히고 ‘헤다 가블러’라는 작품에 깃든 추억과 깊은 의미를 밝히기도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초연 때 원로이신 극작가 김의경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이 제가 현대 극장 오디션을 보러가갔을 때 저를 배우로 뽑으신 분이다. 그분께서 명동에서 ‘헤다 가블러’를 하자고 했을 때 ‘그게 뭐예요?’라고 했었다. 당시 ‘헤다 가블러’는 상업 극단에서는 올린 적이 없었다. 초연 때 이 작품을 하면서 ‘도대체 이런 작품을 왜 안 했을까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혜영 같은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지’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그걸 믿었고, ‘헤다 가블러’는 유니크한 내가 있었기 때문에 공연할 수 있다는 큰 착각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다. 저의 그 큰 착각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적어도 연극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만나지 않고 있다. (웃음)”

작품 속 헤다는 반년 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새신부다. 60대에 접어든 이혜영은 새신부를 연기한다는 점에 대해 ‘마이 페어 레이디’를 예로 들었다.

“영화를 보면 오드리 헵번이 꽃 파는 아가씨로 나오는데, 원작인 조지 버너드 쇼의 ‘피그말리온’ 희곡을 보면 이 역할을 꼭 10대가 하라고 쓰여있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역할은 어느 배우가 해도 상관없다고 되어 있다. 카메라에 담기는 지금 제 모습은 있는 그대로이지만, 무대 위에서 우리가 ‘헤다 가블러’라는 공연을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나갈 때 결코 제 나이는 문제 되지 않는다.”

박 연출 역시 “무대라는 곳이 배우들의 나이를 모르게 만든다”면서, “이를 무대의 신비라고 부르는데, 공연을 보시면 경험하게 될 것”이라 자신했다.


13년 전 공연과 달라진 부분에 대해서도 들어볼 수 있었다. 박 연출은 ‘헤다 가블러’라는 작품에 대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고 창조할 수 있는 어떤 한 인간의 이야기”라고 정의하며 초연 때보다 훨씬 원본에 충실하려고 애썼다고 밝혔다.

“초연 때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에 대한 결핍으로 신이 되려고 했던 여자로 헤다를 해석했다. 그래서 사실 초연 때가 훨씬 더 카리스마가 넘친다. 근데 지금은 본질적으로 헤다가 ‘인간’이라는 점에 초점을 잡아서 접근했다.”

또 박 연출은 이번 시즌 ‘헤다 미장센’의 콘셉트를 ‘사이키델릭’으로 잡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조명도 음악도 은근히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다”면서, “미장센은 무대나 도구를 움직여서 하는 것보다는 배우들의 관계에서 만들어내는 미장센을 주목해서 만들었다. 그래서 인물들이 가진 관계를 어떻게 밀도 있고 함축적이면서 아름답게 그릴까에 더 초점을 맞췄다”고 전했다.

이번 재연을 올리기 위해 입센을 다시 공부한 박 연출은 양식적인 틀을 생각했던 초연과는 반대로 좀 더 라이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헤다 가블러’를 무대 위로 올렸다. 따라서 작품의 시대적 배경 역시 19세기 말이 아닌, 1970년대로 옮겨졌다.

“자유와 신세계를 꿈꾸는 젊은 청년들에게 가장 맞는 시대가 언제인지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뢰브보르그와 헤다도 같이 꿈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경은 히피즘이 성행했던 1970년대 중반으로 잡게 되었다. 무대를 꾸리면서 리처치를 해봤는데 지금 현대에서도 히피 문화들이 유행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런 하이엔드 소파 같은 가구를 활용했다. 따라서 시대적인 감수성을 고려해 좀 더 라이트하게 만들고, 나중에 헤다의 욕망과 갈망을 점점 진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접근했다.”



마찬가지로 초연과 어떻게 다르게 준비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이혜영은 “모든 걸 연출과 동료 배우들한테 맡기고 체력적인 부분과 같이 하는 배우들이 제가 헤다라고 믿게 만드는 것에 신경을 썼다”면서, “연습 때부터 공연이라 생각하면서 긴장했고, 동료들에게 신뢰를 주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13년 만에 공연이 다시 무대 위에 올려지는 과정 중에서는 의도치 않은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개막 하루 전 드레스 리허설 당일 ‘브라크’ 역을 맡은 윤상화가 쓰러졌고, 공연 취소 또는 개막 연기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이에 국립극단 시즌 단원인 홍선우가 급하게 투입되었고, 빠르게 적응한 배우 덕에 무사히 공연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박 연출은 “제가 SOS를 쳤다. 정말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일주일 연습해서 무대에 오르는 거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정말 살 떨리는 일인 거다. 그래서 부담감을 갖고 연습을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대사를 이틀 만에 다 외웠고, 그때서야 밥을 먹었다고 하더라”면서, “향간에서는 처음부터 브라크 역을 맡은 사람 같다는 얘기까지 듣고 있다. 배우들의 집중력과 잠재력에 정말 놀라고 있다.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걸 이번에 또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이혜영은 개막 직전 건강 상의 문제로 참여치 못한 윤상화에 대해 “아주 특별히 아름다운 배우”라고 언급하면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저희는 정말 의기양양하게 시작했다. 근데 공연 전날 그런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우리 모두 절망했다. 패잔병들처럼 전의를 상실해 있는 와중에 바로 새로운 배우를 찾아야 하는 현실에서 고통과 죄의식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공연을 해야하나?’ 생각했지만 극장을 찾아주는 관객들에게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너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일주일 동안 많은 변화를 갖게 했다.”



“이렇게 공연하고 있다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이혜영은 급하게 합류하게 된 홍선우를 언급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카메라는 대사를 하룻밤 만에 외워서 하는 건 가능하다. 드라마도 새벽에 나오는 대본을 받아서 외워서 촬영하지 않나. 근데 연극은 갈수록 어렵다. 갈수록 연습한 것만큼 나와서 미친다. 홍선우 배우도 지금 너무 고생하고 있다. 매일 미리 와서 혼자 연습 다 하고, 끝나는 날까지 더 힘들 거고 고생할 거다. 우리 배우들의 장점은 전부 직업 배우가 아니라 창조인이라는 점이다. 서로 영감을 주고 영향을 받으면서 만들고 있다.”

무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는 이혜영이 연극에 대해 갖고 있는 책임감 역시 막중하다. 그는 “연극을 보러 와주는 분들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젊은 분들이지 않나. 그분들이 공감할 수 있으려면 연극은 계속 젊어질 수밖에 없고, 새롭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철학들을 보여줘야 할 의미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동예술극장을 찾아주시는 관객분들은 지적 갈망이 높으신 분들이다. 입센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고, 우리가 어떻게 만들었나 감상하러 오시는 거다. 이번 프로덕션은 창조인들끼리 모여서 서로에게 영감 주면서 가장 입센다운 클래식을 젊은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근데 우리가 드레스 입고 나와서 어렵게 하면 재미없지 않나.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에게 클래식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마지막으로 박 연출은 “지금 ‘헤다 가블러’가 전 세계적으로 많이 올려지고 있다. 왜 지금 이 시대에 ‘헤다 가블러’가 이렇게까지 각광 받고 동시다발적으로 올려지는가에 대해 한번 질문들을 가져봤으면 좋겠다”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주위 인물들의 관계에서 끼치는 영향력을 유심히 보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서로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느껴보셨으면 좋겠고, 헤다라는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걸 너무 선입견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이혜영 배우의 나이를 초월한 무대의 신비를 한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한편 ‘헤다 가블러’는 이혜영, 고수희, 송인성, 김명기, 김은우, 홍선우, 박은호가 출연하며 오는 6월 1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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