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국일보 언론사 이미지

남과 다르면 이상한 사람?... 공격 대상 필요한 사람들이 '희생양'을 만든다

한국일보
원문보기

남과 다르면 이상한 사람?... 공격 대상 필요한 사람들이 '희생양'을 만든다

속보
이노스페이스 '한빛-나노' 발사 시도 중단…오늘 발사 못해
[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
<6> 영화 '위키드'의 엘파바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


영화 '위키드' 속 초록색 피부를 가진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영화 '위키드' 속 초록색 피부를 가진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위키드'(Wicked)를 뮤지컬로 만났던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녹색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 아버지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 채 소외된 주인공이 어떻게 세상의 차별을 극복하고 자유로워졌는지를 그린 위키드의 원제목은 '위키드: 오즈의 마녀들의 숨겨진 이야기'(Wicked: The Untold Story of the Witches of Oz)다.

도로시와 환상의 나라 오즈로 이미 친숙했던 판타지 ‘오즈의 마법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 위키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적을 악으로 만드는가’란 강렬한 광고 문구처럼 원작을 뒤집어엎으며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경계를 흔든다.

영화는 뮤지컬과 또 다른 감동과 질문을 던져준다. 한정된 뮤지컬 무대에서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서사, 시각적으로 확장된 세계 속에서 엘파바는 여전히 외롭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존재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그 세계가 엘파바를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그 과정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초록 피부라는 이유로 소외된 엘파바



'위키드'의 엘파바.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위키드'의 엘파바.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진정한 마법은 다름을 인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이 영화 위키드의 주제다. 주인공 엘파바를 모든 사람이 ‘이상한 존재’로 따돌렸던 것은 그녀의 피부가 초록색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남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아이라서 엘파바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살아야 했다. 심지어 아버지마저 자신의 딸을 온전한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겉모습이 평범한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부끄러운 존재로 외면당했고, 불편한 존재로 멸시됐으며, 두려운 존재로 낙인찍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해준 한 존재 덕분이었다. 그가 바로 보모 미스스다. 미스스는 자신 역시 사회에서 힘을 잃은 동물 계층에 속해 있었지만 엘파바에게는 유일하게 온정과 존중을 주었던 삶의 보루였다. 소외당한 존재가 또 다른 소외 존재로부터 위로받는 특별한 관계를 통해 엘파바는 세상에 등을 돌리지 않게 된다.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와 미스스의 동물성은 ‘보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당한 공통의 낙인으로, 이는 곧 소수자에 대한 집단의 차별 메커니즘으로 드러난다. 다수가 정한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불편해하고, 무시하고, 두려워하다가 결국엔 억압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이다. 엘파바는 그 왜곡된 잣대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엘파바를 ‘악당’으로 만든 심리



엘파바와 동생.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엘파바와 동생.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초록색 피부의 엘파바는 태어날 때부터 다름의 표식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해친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의 엘파바는 아픈 동생을 보살피며 조용히 살아가던 아이로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며 죽은 듯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를 괴물로 불렀고, 외면했으며, 조롱했다. 그녀가 위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다름’을 견디기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름’은 비단 엘파바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즈의 세계에서 처음 희생양이 된 존재는 ‘동물’이었다. 사람처럼 말을 할 줄 알고 사람과 비슷한 지성을 가졌다는 점을 불쾌하게 여긴 인간들은 동물들을 점차 학교 교육에서 배제시켰고 동물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빼앗았다. 그 상징적인 희생자가 바로 엘파바가 존경하던 염소 교수 딜라몬드다. 오즈 유일의 동물 교수였던 그는 강단에서 쫓겨나 점점 말을 잃어가다가 ‘동물이 교육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조용히 제거된다. 딜라몬드는 단지 학자로서의 존엄만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그는 말을 통해 인간과 동등해지려 했던 존재로서의 권리를 깡그리 박탈당했다.

엘파바는 부당하게 도태된 딜라몬드 교수를 관찰하며 오즈 사회의 차별 구조를 처음으로 똑똑히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가 아니라 ‘말을 했다는 이유’로 탄압받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한다. 동물들은 ‘말할 수 있음’이, 엘파바는 ‘다름을 주장할 수 있음’이 위협 조건이었다.

오즈 사회는 점차 더 자극적인 희생양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미 동물들을 배제하면서 ‘정상’의 기준을 확립한 오즈는 그 기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벗어난 존재인 마법을 가진 초록 피부의 여성 엘파바를 새로운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 과정은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이야기한 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ing)의 전형적인 형태다. 불안한 집단은 자신의 불안을 외부의 존재에게 전가하며 통제감을 되찾는다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우리는 감정이 서툰 사람이나 말수가 적은 사람, 혹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너는 좀 이상해’, ‘넌 그게 문제야’라는 이야기를 쉽게 뱉는다. 정신과 진료실에서도 자주 접하는 사례다.

“저는 그냥 조용히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피하더라고요.”

“힘들다고 말했더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트라우마는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 이후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서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차별은 상처를 주고, 낙인은 그 상처를 고립시킨다. 엘파바가 누구를 공격해서 악당이 된 것이 아니다. 단지 공격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 때문에 엘파바는 악당이 되었다.

영화 '위키드' 포스터.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영화 '위키드' 포스터.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엘파바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


오즈의 사람들은 엘파바를 악당으로 만들었지만, 엘파바는 스스로를 악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낙인을 내면화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덧씌워진 서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세상이 원하는 방식에 순응하지 않고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날아오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엘파바의 이탈은 패배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나는 오롯이 나로 존재할 뿐이며 나를 증오하는 방식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이는 심리학적으로 '진짜 자기'(true self)와 관련된 중요한 태도다. 자신의 감정과 가치에 충실한 사람은 외부의 인정이 없어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 물론 엘파바 역시 흔들렸고 고독했지만, 끝내 자신을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가장 완강한 방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다.

영화 '위키드' .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영화 '위키드' .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이러한 정체성의 유지는 소수자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 특히 큰 의미를 가진다. 많은 내담자가 상담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너무 유별나서 사람들이 날 힘들어했던 것일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르게 본 사회의 시선과 집단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엘파바처럼 말하지 않고 있어도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나 남을 도와줬음에도 외면당한 사람, 세상이 필요로 한 희생양으로 공격받은 사람이 있다. 이들은 절대로 이상하지 않았다. 말을 했고, 다르게 생각했으며, 불편함을 드러냈기 때문에 배제당한 것이다. 그 사람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것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누구도 차별당할 이유가 없으며 차별해서도 안 된다.

엘파바는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그 이름에 스스로 동의하지 않았기에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고 어떤 상처를 겪을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나로 서있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엘파바의 선택처럼 말이다. 만일 다름으로 인한 차별과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면,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한 엘파바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충분히 날아오를 수 있다. 차별과 편견을 떨쳐버리고.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