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일사일언] 밭에 검은 비닐 덮는 까닭

조선일보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원문보기

[일사일언] 밭에 검은 비닐 덮는 까닭

서울맑음 / -3.9 °
이맘때 교외 나들이를 가면 검은 비닐로 덮인 밭을 볼 수 있다. 토양 표면을 비닐과 같은 무기물로 덮는 ‘멀칭(mulching)’은 20세기 중반에야 농업사(史)에 등장한 기법이다. 자연 상태의 토지엔 온갖 풀이 뒤섞여 자란다. 이래선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작물보다 잡초가 웃자라면, 비료와 물을 주며 밭을 가꾸는 의미도 사라진다. 파종(播種) 전 제초제를 살포해 잡초의 싹을 말리고, 작물이 자라는 중간중간에도 사람 손으로 꾸준히 잡초를 솎아 내줘야 작황이 유지된다. 이는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고된 노동이자, 밭작물의 가격을 높이는 원인이다.

이런 노동력을 덜어주는 게 멀칭이다. 흙 표면을 모두 검은 비닐로 덮어버리면, 혹여나 싹을 틔운 잡초도 햇빛을 받지 못해 비닐 밑에서 노랗게 죽어버리고 만다. 선택받은 모종만 비닐에 인위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에 자리를 잡고, 밭의 양분과 수분을 독차지하며 자란다. 따로 잡초를 솎아 내는 고된 노동이 개입될 여지도 없고, 농약 사용도 줄일 수 있다. 볏짚 같은 유기물로 덮을 수도 있지만, 비닐이 더 적합하다. 자연적으로 분해되지 않는 골칫덩이 비닐의 특성 덕분에 더 오랫동안 표면을 꼼꼼하게 덮을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멀칭 기술을 수천 년 전부터 썼다. 비닐 대신 물로 흙 표면을 덮은, 일종의 수층 멀칭이 바로 논이다. 논에 물을 대면, 물 높이보다 키가 작은 식물은 모두 죽는다. 그때 모판에서 미리 키워둔 벼를 옮겨 심으면, 벼 외에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이 구축된다. 식물의 선택적 생장 통제란 점에서 멀칭과 원리가 같다. 동아시아 지역이 근대 이전 세계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았던 비결이다. 흥미로운 건, 우리나라에선 자연 상태를 거세하고 원하는 것만 키워내는 방식이 농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권만 해도 그렇다. 명색이 모내기의 민족인데, 밭에 키울 만한 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탄만 나온다. 이참에 정치권도 멀칭을 도입해 잡초로 자랄 만한 인물들은 아예 밭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떨까.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