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일인 지난 4월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은 유족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연합뉴스 |
고영매 | 제주고 특수교사
얼마 전,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의 상담을 위해 학교를 찾았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감성이 풍부하다며, 제주4·3 관련 그림책을 읽던 수업 시간에 아이가 “너희들은 안 슬퍼?”라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조용히 웃었다. ‘우리 아이가 감수성이 깊구나’ 싶어 내심 아들의 마음이 기특했다.
그리고 4월3일 아침, 아들이 잠에서 깨자마자 나를 흔들며 말했다. “엄마, 묵념해.” 그 한마디가 내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침묵을 깨웠다. 4·3의 비극이 아이 마음 깊숙이 새겨졌다는 걸 느낀 순간, 말로 다 못할 울림이 가슴에 차올랐다.
올해 나는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했다. 마음을 다루는 공부는 곧 내 안의 이야기들과 마주하는 일이다. 상담에서는 한 개인의 상처가 세대를 거쳐 전해지며, 가족의 문제는 사회 구조와 긴밀히 맞닿아 있음을 배운다. 한 내담자의 우울은 4·3 당시 형제들을 잃은 할아버지의 말 하지 못한 상실, 가부장적 가족문화, 척박한 제주라는 환경과 맞물려 실처럼 얽힌 결과일 수 있다. 그 상처는 설명되지 못한 채 조용히 흘러 내려와, 지금 우리에게 정서적 불안이나 관계의 어려움이라는 모습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4·3은 누군가의 부모를, 누군가의 아이를 앗아간 사건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고통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이름을 잃고, 감정을 숨기고, 그저 침묵 속에 살아냈다. 지금도 우리는 그 ‘작별하지 못한 마음’의 흔적을 안고 산다. 감춰진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 오히려 말해지지 못한 기억은 또 다른 고통이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제주가 ‘평화의 섬’이라 불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섬사람들의 마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회복은 혼자의 몫이 아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기관에서 유족과 도민을 위한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접근성은 낮고 지속성도 부족하다. 상담은 여전히 ‘특별한 사람만 받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 머물러 있고, 비용과 공간의 제약 또한 크다.
한류 콘텐츠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폭싹 속았수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제주 문화가 재조명되는 시대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4·3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외부의 찬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며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섬에서 평화를 지켜내는 방식이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 모든 제주도민이 조건 없이, 무료로 상담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치료와 치유는 사적인 일이 아닌 공공의 과제다. 국가가 먼저 “당신들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작별하지 못한 이들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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