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일 전쟁서 이스라엘이 이틀만에 골란 고원 빼앗는 데 핵심 정보 사전 제공
시리아인 기업가로 위장해, 시리아 군ㆍ정부 최고층과 교류하며 1급 기밀 빼돌려
1965년 1월 체포돼, 수도 다마스쿠스의 광장서 공개 교수형 당해
28세에 혼자 된 아내 “남편은 ‘여왕’을 약속했지만, 나는 남편도 왕관도 잃었다”
시리아인 기업가로 위장해, 시리아 군ㆍ정부 최고층과 교류하며 1급 기밀 빼돌려
1965년 1월 체포돼, 수도 다마스쿠스의 광장서 공개 교수형 당해
28세에 혼자 된 아내 “남편은 ‘여왕’을 약속했지만, 나는 남편도 왕관도 잃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다디 바르네아 모사드(해외정보기관) 국장은 18일 60년 전인 1965년 5월 18일 시리아에서 붙잡혀 공개 처형된 모사드 요원 엘리 코헨의 유품과 관련 서류 2500점을 그의 아내 나디아 코헨(88)에게 전달했다.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인물로, 1961년말부터 1965년 1월 붙잡힐 때까지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리아인 기업인으로 행세하면서 당시 시리아 정부과 군의 최고위층과 교류해 1급 기밀을 모사드에 전달한 모사드 스파이였다. 나중에는 시리아 국방장관의 고문까지 지냈고, 한때 시리아 국방장관의 후보에 오를 정도로 시리아 바트당 정권과 군 수뇌부 내부에 깊숙이 침투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일부 유품을 전달하며 “코헨의 유품은 모사드의 특수 작전에 의해 회수됐으며, 시리아 정보국의 금고에 보관돼 있던 것”이라며 “엘리는 이스라엘의 전설이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한 이래 최고의 스파이였고 그와 같은 이는 없었다”고 칭송했다.
![]() |
이스라엘 모사드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엘리 코헨의 생전 모습.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그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인물로, 1961년말부터 1965년 1월 붙잡힐 때까지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리아인 기업인으로 행세하면서 당시 시리아 정부과 군의 최고위층과 교류해 1급 기밀을 모사드에 전달한 모사드 스파이였다. 나중에는 시리아 국방장관의 고문까지 지냈고, 한때 시리아 국방장관의 후보에 오를 정도로 시리아 바트당 정권과 군 수뇌부 내부에 깊숙이 침투했다.
![]() |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남편 엘리 코헨의 처형 60년이 지난 18일 아내 나디아 코헨이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와 바르네아 모사드 국장의 위로를 받고 있다./이스라엘 정부 |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일부 유품을 전달하며 “코헨의 유품은 모사드의 특수 작전에 의해 회수됐으며, 시리아 정보국의 금고에 보관돼 있던 것”이라며 “엘리는 이스라엘의 전설이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한 이래 최고의 스파이였고 그와 같은 이는 없었다”고 칭송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엘리는 전략ㆍ군사ㆍ외교 분야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생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며, 지금도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군 교본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모사드가 회수한 코헨 관련 유품과 서류는 1965년 1월 그가 체포된 이래 그가 조사 받은 서류, 육필 메모, 그가 시리아 정부ㆍ군 수뇌부와 교류한 사진, 아파트 열쇠, 위조 여권과 신분증, 이스라엘에 남아 있던 아내 나디아가 당시 시리아 대통령을 비롯해 전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냈던 남편의 석방 탄원서들이다. 일부는 복사본이 이미 공개됐지만,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었다.
![]() |
모사드의 특수작전으로, 처형 60년 만에 시리아 정보국 금고에서 빼내 공개된 스파이 엘리 코헨의 유품과 체포된 후 조사 자료의 일부/이스라엘 총리실 |
1924년 12월 이집트에서 태어난 엘리 벤-샤울 코헨은 아랍어와 히브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하고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을 보유해 적진(敵陣) 깊숙이 활동할 모사드 스파이로는 최고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귀국한 시리아인 기업가 ‘카밀 아민 타베트’로 위장해, 부패한 시리아 정부 및 군 수뇌부에 뇌물과 파티를 제공하며 어울렸다. 자신의 가족은 당시 많은 시리아 부유층이 그러했듯이 외국에 두고 온 것처럼 꾸몄다. 모사드를 통해 암호화된 편지를 이스라엘의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고, 때때로 ‘휴가’ 명목으로 이스라엘에 귀국해 아내와 세 자녀를 만났다.
그가 제공한 정보는 1967년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한 6일 전쟁(6월5일~10일)에서 이스라엘군이 이집트ㆍ요르단에 이어 시리아군을 격파하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골란 고원을 빼앗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시리아군은 해발 1000m가 넘는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 북부 지역에 포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헨은 시리아군이 이 고원에 구축하는 방어시설의 설계도와 건설 진척률, 취약 지점들을 계속 무선 통신과 암호로 보냈고, 시리아 국방부에 “더위에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그늘을 제공할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도록” 권유해 관철시켰다.
결국 이런 정보 덕분에, 이스라엘군은 포격ㆍ공습 지점의 정확한 좌표를 확보해 이틀만에 고원을 장악했다. 또 시리아가 소련으로부터 도입하려는 T-54/55 전차, MiG 전투기, 방공시스템 등의 수량과 시점을 사전에 보고해 이스라엘이 이들 무기가 완전 배치되기 전에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코헨은 또 6일 전쟁 직전에는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관통하는 요르단강의 물줄기를 북쪽에서 돌리려는 계획을 전달해, 이스라엘군이 시리아의 수로 전환 장비를 1964~1967년 계속 파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시리아 정부는 계속 극비 정보가 유출되자 일정 기간 무선 통신을 중단하고 소련제 최신 장비로 탐지했고, 모사드에 무선 통신을 하던 코헨을 붙잡았다. 코헨은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알 마르제 공장에서 공개 교수형을 당했다.
코헨은 처형되기 3일 전인 1965년 5월15일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나디아, 이미 지나간 일로 슬퍼하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오.”
![]() |
1965년 5월18일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알 마르제 광장에서 공개 처형된 엘리 코헨. |
나중에 밝혀졌지만, 코헨은 1963년 시리아 바트당의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 자신의 신변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에 모사드에 이제 활동을 접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모사드는 한번 더 시리아로 갈 것을 명령했고, 코헨은 아내에게 “영구 귀국하기 전에, 이번이 마지막 시리아 여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1965년 1월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의 삶과 활약상은 2019년 넷플릭스에서 6회분의 ‘더 스파이’라는 영화로 제작 방영되기도 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에 회수한 문서들은 후세를 교육할 자료이며, 실종자·포로·납치자 전원 귀환이라는 국가의 흔들림 없는 약속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코헨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고,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시리아 정부는 유해 인도를 거부했다. 바르네아 모사드 국장은 “생존자에겐 회복을, 전사자에겐 이스라엘 땅에 안식을 누릴 수 있게 계속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 나디아 코헨은 남편이 모사드에서 일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끝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암호 편지를 보낼 때에도, 마치 유럽에서 보내는 것처럼 했다.
남편이 처형됐을 때 28세였던 아내 나디아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세 아이를 키웠다. 이스라엘 곳곳에 남편의 이름을 딴 박물관과 거리가 들어섰지만, 그는 2011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남편은 내게 여왕처럼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남편도 왕관도 갖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현재 남편의 유해를 송환하는 캠페인을 이끌고 있다.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
[이철민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