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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르신들 활짝 웃게 한 ‘캄보디아 송가인’

조선일보 광주=최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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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르신들 활짝 웃게 한 ‘캄보디아 송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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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초월읍 마을회관 함께 쓰는 외국인·어르신들의 특별한 행사
지난 11일 오전 경기 광주시 초월읍 초월행정복지센터 대강당에서 어버이날 행사가 열렸다. 캄보디아에서 온 잠 바씨가 가수 문희옥의 히트곡 ‘평행선’을 부르자 노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최하연 기자

지난 11일 오전 경기 광주시 초월읍 초월행정복지센터 대강당에서 어버이날 행사가 열렸다. 캄보디아에서 온 잠 바씨가 가수 문희옥의 히트곡 ‘평행선’을 부르자 노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최하연 기자


“우리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는가~. 캄캄한 미로를 헤매이네.”

지난 11일 오전 10시 경기 광주시 초월읍 행정복지센터 대강당. 장미 무늬가 수놓인 검은색 드레스와 은색 구두를 신은 캄보디아인 잠 바(Cham Pa·33)씨가 트로트 ‘평행선’(문희옥)을 애달프게 부르자 어르신들이 덩실덩실 춤을 췄다. 잠 바씨는 2년 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근로자다. 한국 생활 3년 차가 되면서 한글은 물론 한국 노래도 익혔다. 애달프게 노래를 부르자 동네 노인들이 그를 ‘초월읍의 송가인’이라고 외쳤다. 주민 한덕자(74)씨는 잠 바씨 어깨를 토닥이면서 “평소에 인사도 잘 못 했는데, 너무 잘 불러줘서 고맙다”고 했다.

초월읍의 외국인 근로자 70여 명과 70~90대 어르신 50여 명은 지나간 어버이날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 이날 ‘합동 잔치’를 열었다. 올해가 두 번째 행사다. 잠 바씨를 포함한 외국인 근로자들은 마을회관 건물에서 어르신들과 더부살이 중이다. 외국인 근로자 및 다문화 가정 이주 여성들의 문화, 언어 적응을 지원하는 까리따스(Caritas·라틴어로 사랑을 의미) 이주민초월센터는 2021년 10월 마을회관 2층에 문을 열었다. 법무부가 이민자 사회 통합 프로그램 차원에서 지정하고, 천주교가 운영 중이다. 바로 아래층이 경로당이다.

가나·네팔·미얀마·태국·필리핀 등에서 온 이주민 200여 명이 매일 센터를 찾아 한글과 한국사 등의 수업을 듣는다. 인근 중소기업·물류 센터에서 일하며 거주하는 초월읍 외국인들은 3205명. 초월읍 전체 인구(5만5076명)의 5.8%로, 한국 평균(5.2%)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지금은 둘도 없는 ‘동네 이웃’이 됐지만, 3년 7개월 전 경로당 바로 위층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왔을 땐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어르신들이 외국인 근로자들을 향해 “깜둥이” “냄새 나니 얼른 나가라”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하기 일쑤였다. 차별의 시선에 익숙한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외국인들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것 없이 혜택만 받아가는 것 아니냐”는 어르신들의 외침은 상처였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 광주시 초월읍행정복지센터, 초월읍 거주 외국인 청년들이 초월읍 거주 어르신들에게 카네이션을 전달하고 있다./최하연 기자

지난 11일 오전 경기 광주시 초월읍행정복지센터, 초월읍 거주 외국인 청년들이 초월읍 거주 어르신들에게 카네이션을 전달하고 있다./최하연 기자


좀처럼 섞이지 못하던 이들이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작년 어버이날부터다. 까리따스 이주민센터장 이정은 케빈 수녀가 외국인 40여 명과 어르신 30여 명이 참여하는 특별한 어버이날 행사를 처음 기획했다. 외국인 청년들이 직접 트로트를 부르고 ‘어버이에게 드리는 손편지’를 낭독했다. 직접 끓인 육개장도 대접했다. ‘다른 인종’이라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황영림(73)씨는 “처음에는 냄새도 피부색도 달랐으니 정이 갔겠나”라면서도 “같이 노래 부르고 밥도 먹으니 결국 다 같은 친구고 이웃이더라”고 했다.


이날 트로트 공연이 끝난 후엔 카네이션 전달식이 열렸다. 캄보디아에서 온 샘 으은(Sam Oeurn·34)씨가 카네이션과 함께 ‘어버이날’로 사행시를 적은 편지를 낭독했다. 운에 맞춰 ‘어버이날 엄마·아빠 사랑해요/버스로 가면서 예쁜 꽃 샀어요/이 꽃을 엄마·아빠가 좋아해요/날마다 부모님께 아름다운 꽃 많이 드리고 싶어요’라고 했다. 눈물이 고인 이종수(87)씨는 “낯선 나라에서 매일같이 일하면서 부모도 못 만나고 얼마나 외롭겠느냐. 떨어져 사는 우리 애들이랑 비슷하다”고 했다. 마을 이장 김진구(66)씨는 “처음에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다 같은 ‘우리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광주=최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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