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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를 깨고, ‘나’에서 ‘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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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를 깨고, ‘나’에서 ‘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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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들’에서 이름 바꾼 ‘아이들’, 이름에 담긴 정체성의 서사

‘아이들’이 최근 공개한 티저 영상. 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이들’이 최근 공개한 티저 영상. 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두 여성 뮤지션 슬릭과 이랑이 주고받은 서간 에세이 ‘괄호가 많은 편지’에서 이랑은 한 편의 글을 완성한 뒤 눈으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비문, 오탈자를 음성 읽기 서비스를 이용해 잡아낸다는 팁을 전한다. 어느 날 그는 이 서비스가 괄호 안의 내용은 읽지 않는다는 걸 발견한다. 꼭 하지 않아도 문맥상 통하는 말이라면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기술의 엄중한 판단 덕이다. 이랑은 쓴다. “역시 괄호 안의 내용은 소리 내지 말고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걸까요.”



‘(여자)아이들’은 케이팝에서 대표적으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이름을 가진 팀이었다. ‘여자아이들’이라고 읽을 수 있지만, 데뷔 때부터 그들은 줄곧 괄호를 묵음 처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아이들’이라 믿었다.



예견된 미래였다. 2025년 5월2일, ‘(여자)아이들’((G)-IDLE)이 공식 팀명을 ‘아이들’(i-dle)로 변경한 것은. 스페셜 미니 앨범 ‘위 아 아이들’(We are i-dle)과 미니 8집 앨범 ‘위 아’(We are)의 순차 발매 예고와 팀명 변경이 함께 이루어졌다. 변화를 위한 시동은 2022년 공개된 ‘톰보이’의 노랫말 “남자도 여자도 아냐 (그저 난 아이들이야)”(It's neither man nor woman (Just me I-DLE))에서부터 걸렸다. 이번에 공개된 티저 영상에서도 멤버들은 생활 반경 속 알파벳 ‘지’(G)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이 쌓아온 유산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가짜 손톱을 떼어버리거나, 구두굽이 부러져도 일단 걸어가거나,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는 식으로.



큐브엔터테인먼트는 아이들이 그 어떤 특정 성별로도 정의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영미권에서는 ‘그’(he/him) 또는 ‘그녀’(she/her) 같은 이분법적 성별 대명사가 성적 지향이 다른 이들에게는 자기표현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성별 불특정적 대명사인 ‘그들’(they/them)을 단수형으로 쓰는 방안이 권장된다. 아이들은 또 다른 방안을 실천해낸 셈이다. 그들은 이름에서 일부를 탈락시켜 진짜 원하던 이름을 가진다.



‘나’를 주어로 둔 채 만들고(‘I Made’), 태우고(‘I Burn’), 느끼던(‘I Feel’) 이들은 이제 새로운 주어 ‘우리’를 데려온다. 그동안 자기 자신으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탐색해보았으므로 이런 변화가 가능해졌다. 큐브엔터테인먼트는 ‘서사적 반전’이라는 표현을 끌어왔다. 한 아이돌의 팀명 변경이 배타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들에게 약 7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나’로부터 ‘우리’로 외연을 넓히는 일이 결코 한순간에 벌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암시한다. 아이들은 이전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게 쉽다고 말하는 팀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지난 몇 년간 자신들을 포함해 케이팝 걸그룹들이 경쟁적으로 파고들었던 ‘자기애’의 한계를 마주한다. 보다 더 확장된 사랑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허물과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곤충의 ‘탈피’와도 같은 사건에서 선제되어야 하는 건 적절한 작별의 시간이다. 데뷔일인 5월2일에 열린 전시회 ‘(지)엑시비션’((G)EXHIBITION)에 모인 팬들은 ‘G’가 새겨진 관 주변에 팬덤의 상징색인 보라색 꽃을 헌화했다. 이토록 의식적인 행위는 나와 정서적으로 밀착돼 있던 대상과 잘 헤어지는 일을 돕는다. 후련함, 놀라움, 그리움이 섞여 있을 팬들의 감정은 단일하게 재단될 수 없다. 그렇게 ‘아이들’과 팬들은 함께 다음 챕터로 나아간다.





서해인 콘텐츠로그 발행인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케이팝을 듣습니다. 케이팝이 만들어낼 ‘더 나은 세계’를 제안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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