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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패 덕분에 구원받은 예술가”

조선일보 김성현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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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패 덕분에 구원받은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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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출신 거장 켄트리지 내한
회화·오페라 등 넘나들며 활약
오늘부터 음악극 ‘시빌’ 등 선보여
9년 만에 내한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GS아트센터

9년 만에 내한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GS아트센터


“배우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다음엔 영화감독이 되려고 했다가 또다시 실패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구원받는(rescued) 각자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70)가 본지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켄트리지는 목탄 드로잉(drawing) 회화와 애니메이션, 오페라 연출까지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예술 거장이다. 실제로 지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으로 회고전을 가졌고, 이듬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오페라 연출을 맡았다.

9년 만에 방한한 그는 9~10일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에서 시와 음악, 무용과 영상이 어우러진 음악극 ‘시빌(Sibyl)’을 선보인다. 시빌은 고대 그리스의 무녀(巫女)이자 예언자라는 뜻이다. 이어서 30일에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연주와 영상을 결합한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을 공연한다. 30일 공연은 서울시향(지휘 로더릭 콕스)이 연주를 맡는다.

이 문제적 예술가를 하나의 장르로 규정 짓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빠졌다. 남아공에서는 정치학과 지역학, 미술을 전공했다. 1980년대부터 ‘목탄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먼저 주목받았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연극 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불과 3주 만에 배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덕분에 배우와 무용수의 동작이나 그림을 그리는 팔의 움직임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철저하고 충분하게 실패를 경험하면, 비로소 그 영역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과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에 맞섰던 인권 변호사들이었다. 켄트리지는 “여섯 살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초콜릿을 몰래 꺼내 먹으려고 상자를 열었다가 부당한 탄압에 숨진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또 “어른들의 폭력, 세상의 위험에 대한 충격이 오랫동안 뚜렷한 잔상으로 남았다”고 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시빌’에서도 남아공 광산 노동자들의 무반주 합창 음악들이 녹아 들어가고, ‘쇼스타코비치 10’에서는 종이 가면을 쓴 스탈린 시대의 예술가들을 등장시킨다. 켄트리지는 “억압적 국가에서 사는 예술가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스탈린의 박해와 학살 속에서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7일 내한 간담회에서도 “작품을 만들 때는 명확한 주제나 아이디어보다는 언제나 질문에서 출발한다. 내게 창작은 정답이나 지식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예술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김성현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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