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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만의 귀환’ 정태춘 만나보니…“문학적 노래 만들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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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만의 귀환’ 정태춘 만나보니…“문학적 노래 만들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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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밥 딜런과의 조우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2022년 어느 날 손녀와 도서관을 찾은 정태춘의 눈에 밥 딜런 가사집이 불쑥 들어왔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는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집으로 돌아와 1천쪽 넘는 책을 주문했다.



“음악을 하나하나 찾아 들으며 가사를 보니, 그도 결국 자기 삶의 풍경을 그려낸 건데,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단 하나의 단어도 가져올 수 없었고, 영감도 받을 수 없었죠. 그런데 분명 자극은 됐어요. 한국에서도 이처럼 문학적 표현의 노래가 나올 수 있는데…, 내가 해보자, 한 거죠.”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 식당에서 만난 정태춘이 말했다. 그는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 이후 2004년께 ‘작곡 절필’을 선언했다. “상업화된 음반시장에서 내 음악이 더 이상 소구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내 박은옥의 간청에 못 이겨 2012년 아내를 위한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냈으나, 다시 절필했다. 그랬던 그에게 밥 딜런이 창작욕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다.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먼저 그동안 쌓아온 글과 사진 등을 들여다봤다. 작곡을 절필했다고 창작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그는 사진과 짧은 글, 스스로 ‘붓글’이라 부르는 붓글씨 등으로 생각을 표현해왔다. 사진 파일을 열면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를 노랫말로 다듬으면 선율도 함께 붙었다. “어릴 적부터 시조 같은 글을 끄적이며 품어온 문학적 욕구”를 음악의 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인 12집 ‘집중호우 사이’가 지난 2일 발매됐다. 13년 만의 정규앨범. 유년기 고향에 대한 기억(‘기러기’)부터 머물던 공간의 풍경들(‘도리 강변에서’ ‘솔미의 시절’ 등), 몇몇 사진에서 출발해 상상을 더한 이야기까지 모두 10곡을 담았다. ‘민들레 시집’ ‘폭설, 동백의 노래’ 2곡은 박은옥이 불렀다.



정태춘·박은옥 12집 ‘집중호우 사이’ 표지. 삶의문화 제공

정태춘·박은옥 12집 ‘집중호우 사이’ 표지. 삶의문화 제공


한곡 한곡이 그대로 시다. 특히 타이틀곡 ‘집중호우 사이’가 백미다.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는 서울 마포 주택가와 을씨년스러운 서해 바다를 순간 이동하듯 넘나드는가 하면, 파란 수국 꽃과 붉은 다리의 어린 농게가 선명한 시각적 대조를 이룬다. 서정적 풍경 속 포성과 섬광, 참호, 붉은 피 같은 전장의 이미지들은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하다. 시간적 배경은 2022년 6월30일 오후 3시부터 3시59분까지. 한편의 짧은 영화를 본 것도 같다.



“누구는 가사가 좀 어렵다고도 하는데, 내 노래는 그냥 풍경화예요. 부담이나 선입견 갖지 말고 그저 이야기하는 풍경 속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물론 어떤 뉘앙스나 메시지를 숨겨두기도 하는데, 그런 거보다 그냥 풍경을 체험하세요.”



어느 생선구이 식당에 걸린 범선 사진에서 출발한 ‘나의 범선들은 도시를 떠났다’에선 유년과 전생의 푸른 바다로 항해하고, 중부고속도로 오창휴게소에서 마주친 중남미 원주민 밴드의 길거리 공연을 보고 만든 ‘엘도라도는 어디’에선 안데스산맥과 마추픽추까지 날아간다.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다채로운 서정적 풍경을 그렸지만, 밑바닥에는 ‘비관론’이 깔려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음악을 그만둔 뒤로는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변천에 죽 관심을 가져왔는데, 결국 도달한 곳은 아쉽게도 비관론이었어요. 우리가 진화해온 과정에는 윤리적 정당성이 없다, 윤리가 욕망에 압도당했다, 산업이 교양과 지성, 양심을 다 죽였다고 봐요. 이번 노래들도 사실은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거죠.”



그렇다 해서 결코 무거운 노래들은 아니다. 특히 마지막에 담긴 트로트풍 2곡은 푸근하고 정겹다. 구슬픈 가락에 자기 연민을 담은 ‘정산리 연가’에 뒤이어 ‘뽕짝’과 레게 리듬을 절묘하게 섞은 ‘하동 언덕 매화 놀이’를 듣노라면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정태춘은 마지막 곡 ‘…매화 놀이’를 두고 “마당놀이 한판 하며 유쾌하게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관광버스 노래 분위기를 내봤다”고 설명했다.



정태춘 스스로도 “음악보다 문학적 가치에 중점을 뒀다”는 이번 앨범을 두고 오민석 시인 겸 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대중가요가 이룩한 최고의 문학적 성취”라고 극찬했다. 김창남 평론가(성공회대 명예교수)는 “이른바 상업적 대중음악을 둘러싼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그의 문학적 욕망이 가장 자유롭게, 집중적으로 발현된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평했다.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가수 정태춘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앨범 가사 10편은 문학 계간지 ‘시와경계’ 2024년 봄호에 먼저 실린 바 있다. 정태춘·박은옥은 오는 17일 부산을 시작으로 24일 대구, 6월18~23일 서울 등으로 이어가는 문학 콘서트 ‘나의 시, 나의 노래’를 펼친다. 노래시집 ‘집중호우 사이’와 붓글집 ‘노래여, 노래여’를 발간하고, 6월 붓글 전시회 ‘노래여, 노래여’도 연다.



“시장의 각광을 기대하는 건 아니고, 우리 노래를 문학적 텍스트로 받아들이려는 분들께 충분한 감상거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안내하는 풍경 속으로 들어와 색다른 여행을 하듯 음악을 즐겼으면 합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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