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경향신문 언론사 이미지

영국의 식민지배가 흩트려 놓은 질서, 카슈미르 분쟁 낳다···인도·파키스탄 78년 분쟁 역사

경향신문
원문보기

영국의 식민지배가 흩트려 놓은 질서, 카슈미르 분쟁 낳다···인도·파키스탄 78년 분쟁 역사

속보
장동혁, 역대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 경신…17시간 12분 돌파
카슈미르 지도. 위키피디아

카슈미르 지도. 위키피디아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 독립 당시부터 78년째 갈등을 이어오고 있다. 양국 영유권 분쟁 지역이자 분리 독립 세력의 테러가 끊이지 않는 카슈미르는 21세기에도 화약고로 남아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국에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나뉘었다. 1858년 영국이 인도·파키스탄 일대를 식민화 하기 전, 무굴 제국(1526~1857년 통치) 등 각 지역을 통치하던 왕국은 대체로 힌두·이슬람교 화합 정책을 펼쳤다.

무슬림과 힌두교도의 대립은 영국 식민 지배와 독립 과정에서 뚜렷해졌다. 영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선거구 분리하는 등 ‘분할 통치’ 전략을 사용하며 종교 분열을 심화시켰다. 1947년 독립 과정에서도 영국은 각 지역을 통치하던 속국에 인도 혹은 파키스탄 둘 중 한 곳에 귀속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힌두교도는 인도에, 무슬림은 파키스탄에 살게 됐다.

잠무 카슈미르국의 정체성은 두 종교의 경계에 있었다. 하리 싱 잠무 카슈미르국 왕을 비롯해 이곳의 지배층은 힌두교도지만, 국민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 싱 왕은 영국에서 독립할 때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파키스탄 민병대는 잠무 카슈미르를 침공했다. 싱 왕은 민병대를 밀어내고자 자신의 왕국을 인도에 귀속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대가로 인도의 군사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1947년 10월 시작된 1차 전쟁은 약 14개월간 이어졌다. 유엔 중재로 휴전하면서 인도는 카슈미르 계곡과 잠무, 라다크 등 카슈미르 중남부 지역을 장악했고, 파키스탄은 아자드 카슈미르와 길기트 발티스탄 등 북서부 지역을 확보했다.

인더스강과 젤룸강의 발원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카슈미르에서의 군사·외교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차 전쟁은 1965년 파키스탄이 잠무 카슈미르 지역을 침공하면서 발발했다. 파키스탄은 인도 북서쪽 펀자브 지역까지 공격했다. 전쟁은 육·해·공군이 모두 동원돼 전면전으로 번졌다. 17일간의 전쟁 동안 사상자는 수천명이 생겼다. 당시 냉전 질서를 주도하던 소련과 미국이 개입하면서 분쟁은 마무리됐다.

인도·파키스탄 3차 전쟁은 카슈미르가 아닌 동파키스탄을 무대로 벌어졌다. 파키스탄은 1947년 독립 당시 동·서로 나뉘었는데, 행정기관 등 주요 인프라와 경제권이 서쪽에 몰리자 동파키스탄의 불만이 고조됐다. 1970년 총선에서 진 서파키스탄 세력이 이듬해 동파키스탄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하자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내전이 국가 간 전쟁으로 번졌다.

인도가 강력히 제압하자 전면전 13일 만에 3차 전쟁의 불씨가 점차 꺼졌다. 양국은 1972년 심라 협정을 통해 1차 전쟁 당시 정한 휴전선을 실질 통제선으로 정했다.


세 번에 걸친 전쟁이 끝났지만 분리주의 세력의 테러, 인도·파키스탄 간 적대 감정 등으로 카슈미르 지역의 불안정은 계속되고 있다. 1989년 인도령 카슈미르에서는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의 무장 반란이 일어났다.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핵무기 실험을 한 이듬해, 파키스탄군이 잠무 카슈미르 카길 지구에서 인도군 진지를 점령하면서 국지 전투가 벌어졌다. 2019년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행정부가 카슈미르를 인도 연방 지역으로 편입하도록 헌법을 바꾼 이후 카슈미르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40명의 인도 군인이 사망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주 3일 10분 뉴스 완전 정복! 내 메일함에 점선면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