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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제적·수감 두 번씩…현장에서 뜨거웠던 노동운동가 김문수

조선일보 권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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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제적·수감 두 번씩…현장에서 뜨거웠던 노동운동가 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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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노동운동가’ 김문수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서울 청계천 피복 공장 등을 7년 이상 다니며 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1970년대 서울대에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제적됐고, 1980년대엔 노동운동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옥고도 치렀다. 민주화 운동 혐의로 투옥됐을 때 고문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김 후보 부친이 빚보증을 섰다가 잘못돼 10세 때부터 판잣집 단칸방에 살았다고 한다. 밥상 하나에 7남매가 호롱불을 켜고 둘러앉아 공부했다는 김 후보는 대구의 경북중·고를 나왔다. 고교 3학년 땐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무기정학을 당했다. 고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서울대 재학 중 학생 운동 서클인 ‘후진국 사회 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유신(維新) 독재 타도 운동을 했다. 김 후보는 학회 활동을 하며 목격한 철거민촌 빈민들 모습에 충격받고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1971년과 1974년 대학에서 두 번 제적당했다.

김 후보는 학교를 떠나 7년 동안 현장 노동자로 일했다. 1975년 청계천 피복 공장에 재단 보조로 취직했다. 처음엔 ‘또또사’ 일을 했다. 옷에 똑딱이 단추 구멍을 뚫는 일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일이 미숙해) 재단사에게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며 “처음으로 겸허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그 시절 열관리기능사 등 자격증을 7가지 땄다. 이 자격증을 갖고 한일공업(도루코)에 보일러공으로 취업했다. 그는 여기서 노조위원장을 맡아 본격적인 노동 운동에 나섰다.

김 후보는 1980년 2월 반국가 모임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수감됐다. 1985년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1986년엔 5·3 인천 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김 후보는 회고록에서 1986년 수감 당시 ‘족수승(손발을 몸 뒤쪽으로 활처럼 묶는 것)’ 등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인간이 이런 비인간적 가혹 행위를 하고, 또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며 “머리를 마룻바닥에 찧어 죽어버리려고 하니 검도 투구보다 더 둔탁한 투구를 (머리에) 덮어 씌웠다”고 했다.


김문수·설난영 부부가 1981년 서울 봉천동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설씨는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출신이다./김문수 캠프 제공

김문수·설난영 부부가 1981년 서울 봉천동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설씨는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출신이다./김문수 캠프 제공


김 후보는 1980년대 ‘운동권의 신화’로 통했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과거 한 TV 프로그램에서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고 했다. 김 후보와 노동운동을 함께한 한 인사는 “그 시절 김문수는 뜨겁게 운동한 혁명가였다”고 했다.

김 후보가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을 때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여동생 유시주씨가 같이 연행됐고, 유 전 이사장 누나인 유시춘 EBS 이사장이 ‘구속자 가족 협의회’ 총무를 맡아 김 후보 옥바라지와 석방 운동을 주도한 일도 있다. 김 후보는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은 유 전 이사장과 TV 토론회에서 “유 전 이사장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온 가족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1990년 민중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정치 진입을 도모했다. 하지만 그 무렵 소련 등 공산주의 동구권 붕괴를 보고 노선을 보수로 전향했다. 그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김 후보는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하던 아내 설난영(72)씨를 만났다. 5공 신군부가 김 후보를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려고 수배령을 내렸을 때 설씨 자취방에 숨어 있으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둘은 1981년 서울 봉천동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 후보는 “우리는 청첩장도 없고, 드레스도 없었다”고 했다. 당시 교회 주변엔 전투경찰 버스 4대가 대기했다고 한다. 결혼을 가장한 노동자 시위라고 의심한 것이다. 김 후보는 최근 경선 토론회에서 ‘별의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어려움 속에서 제 아내를 만난 것. 그보다 더 큰 별의 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권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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