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신현암의 新도쿄견문록] 간소하고 절제된 미학으로 ‘무지 라보’ 건축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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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다이칸야마에 지난해 10월 문을 연 '무지 라보' 외관. 유리로 둘러싸여 내부 풍경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무지 홈페이지 |
거대한 복합 문화 공간 ‘티사이트(T-site)’와 전 세계 여섯 곳밖에 없다는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로 유명한 도쿄 다이칸야마에 지난해 10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공간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무지 라보(MUJI Labo)’. 무지가 만든 의류와 생활 잡화를 취급하는 390㎡(약 118평) 규모 매장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이 공간을 사나(SANAA)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사나는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가 1995년에 결성한 팀으로, 2010년 일본에서 네 번째로 프리츠커상을 받은 세계적 건축 그룹이다.
물론 프리츠커상 수상급 유명 건축가가 상업 공간을 설계하는 일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디올, 프라다 등 도쿄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하지만 이들은 소위 ‘럭셔리 브랜드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무지도 과연 그럴까.
무지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자. 세이부 그룹 창업자 쓰쓰미 야스지로는 1964년 사망하면서 그룹을 두 아들에게 나눠 상속했다. 철도 부문은 요시아키에게, 유통 부문은 세이지에게 물려줬다. 세이지는 비록 기울어가던 백화점을 물려받았지만,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양판점, 편의점 등 다양한 유통 사업에 진출했고, 결국 ‘세이부 세존’이라는 유통 왕국을 구축했다. 그러고는 ‘유통업도 상품을 제조할 수 있다’는 발상 아래 PB(자체 브랜드) 상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일본은 고도성장기였고, 일본인들은 브랜드의 가치를 알기 시작했다. 브랜드가 붙은 제품이 비싼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다. 같은 시기, 일본의 대형 유통 체인 ‘다이에’도 PB 시장을 개척했다. 그러나 세이지의 눈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그는 뭔가 색다른 PB를 만들고 싶었다. 브랜드는 없지만(no brand), 품질은 좋은(good product) 상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가 무인양품(無印良品·무지루시료힌), 줄여서 무지(MUJI)라는 또 하나의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이렇게 도발했다. “이유 있게 싸다.” 싼 게 비지떡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초기에는 40종의 제품을 선보였는데, 그중 ‘부서진 표고버섯’이 압권이었다. 소비자는 고급 우동을 만들기 위해 비싸고 모양이 예쁜 표고버섯을 산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그것을 찢어 국물을 우려낸다. 하지만 국물을 내기 위해 쓰는 표고버섯이 과연 예쁠 필요가 있을까. 국물용이라면 깨지거나 부서져 있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런 버섯을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다면 현명한 소비자는 이쪽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무지의 제안은 소비자 가슴에 와닿았고, 오늘날 7000여 종의 제품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저렴하게 만들려면 이것저것 버려야 한다. 1980년부터 무지의 아트 디렉터를 맡은 다나카 잇코는 브랜드 콘셉트를 ‘간소함(simple)’으로 잡았다. 덕분에 무지는 여백의 미학을 강조하는 일본형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2002년 사망한 다나카 잇코의 뒤를 이은 하라 겐야는 ‘간소함’이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좀 더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비어 있음(empty)’을 택했다.
이제 다시 무지 라보로 돌아가 보자. 전체 외관은 유리로 둘러싸여 내부 풍경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매장 안 천장에는 얇은 금속 링이 설치돼 있고, 그 아래로 의류가 떠다니듯 전시돼 있다. 제품 진열을 최소화해, 공간과 상품이 하나처럼 보이도록 의도했다. 전체적으로 여백과 투명성을 강조해, 무지 특유의 절제된 미학을 건축적으로 표현했다.
기업가의 세계관, 45년 동안 이어온 디자인 콘셉트 그리고 이를 건축으로 구현한 무지 라보. 결국 브랜드를 키우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철학이라는 것을, 무지는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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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암 팩토리8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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