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를 익명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 비발디 음악은 20세기 들어 유명세를 얻었다. 20세기에야 빛 본 ‘사계’가 다시 위기에 처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같이 들을 클래식
비발디, ‘사계’ 중 ‘봄’ 1·2·3악장
첫딸을 낳으신 엄마는 시부모님의 서운한 얼굴을 모르지 않았어요. 산부인과 병동의 병실 창밖에는 벚꽃 나무에 옹기종기 매달린 채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가득했대요. 엄마는 가득한 분홍 벚꽃을 보며 벚꽃이 하늘색이 아닌 것이 야속했을까요? 시부모님이 바라는 아들은 아니지만, 그녀의 첫 아가인 저는 그렇게, 분홍 벚꽃이 만발한 4월에 이 세상에 나왔답니다.
벚꽃으로 비기닝(시작)해서 벚꽃으로 엔딩하는 것. 봄바람도 불어주고 봄비도 내려주는 것. 그것이 봄이죠. 그래서 특별히 비, 바람, 꽃 앞에 “봄”이라는 접두어도 꼭 붙어 있고요.
그런데 얼마 전엔 벚꽃 나무 위에 흰 눈이 펄펄 날렸으니, 이를 어쩌죠? 4월에 눈이라니요! 저는 대뜸 비발디 선생이 생각났어요. 안토니오 비발디가 ‘사계’를 작곡하던 1720년대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비발디는 ‘사계’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특징과 자연의 변화되는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뿐 아니라, 각 계절의 변화에 따른 인간 감정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음표로 그려 넣었어요. 비발디는 계절의 특징이나 변화를 무작정 음악으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을 표현한 것인지를 악보에 짧은 시구(소네트, Sonnet)를 써서 힌트로 남겼습니다. 그 계절적 특징은 결국 우리도 다 아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소리로 변환돼 음악이라는 형태로 바뀐 결과물은 그야말로 경이롭지요.
‘사계’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한 대의 독주 바이올린이 현악기들로 구성된 앙상블 그룹과 협연을 하는 형태예요. 그래서 독주자와 앙상블 그룹 간의 조화를 즐겁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비발디가 묘사한 ‘봄’은, 새들이 노래하고 연약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얼음에 녹은 시냇물이 졸졸 흐릅니다. 가끔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버립니다. 이것들을 1악장에서 묘사하는데, 특히 새소리에서는 바이올린이 높은 소리에서 다양한 꾸밈음들을 사용해 기가 막히게 재현해 냅니다. 조류 전문가라면, 이 바이올린 소리만 들어도, 이 새가 종달새인지 꾀꼬리인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정교해요.
독주 바이올린과 현악기들이 새소리를 주고받는 소리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2악장이에요. 2악장은 라르고(Largo)로 매우 느린데요, 너무 느려서 듣다 보면 잠이 들 수도 있어요. 2악장에서 잠이 오는 건, 비발디가 작곡을 잘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비발디는 2악장에서 잠든 모습을 묘사했거든요. 비발디는 꽃이 만발한 목장에서 나뭇잎들이 달콤하게 속삭이던 중 양치기가 달콤한 봄잠에 빠져 쿨쿨 자는 모습을 음악으로 들려줍니다. 양치기 옆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 곁을 지키며 잠들어 있지요. 그러니 듣다 보면 살짝 졸릴 수밖에요. 비발디가 음표로 그려낸 ‘잠’이 무척 훌륭하죠?
이제 마지막 3악장에서 비발디가 무엇을 묘사했는지 볼까요? 놀랍게도 비발디는 찬란한 봄을 축하하는 즐거운 잔치(파티)를 묘사했어요. 목장에서 열린 춤 파티에서 양치기들이 백파이프 반주에 맞춰 춤을 춥니다. 그래서 음악은 적당히 빠르게 전원풍으로 흘러가지요. 3악장에서 비발디가 써넣은 춤곡의 리듬을 들으면 마법처럼 장단을 맞추고 덩실덩실 몸이 저절로 움직여지죠.
비발디가 묘사한 자연의 모습은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영상 같았어요. 그만큼 생생한 리듬을 써낸 것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비발디의 천재성이 드러납니다. 클래식 음악을 한시도 지루할 틈 없이 듣게 하는 능력. 만약 비발디가 21세기에 활동했다면, 콜드플레이 같은 유명 팝 가수나 프로듀서 뺨쳤을 거예요. 그 비트와 리듬은 300년 전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들을 때마다 이렇게나 빠져드니 말이죠.
‘사계’를 감상할 때, 비발디가 남긴 시구와 함께, 음악과 언어의 연관성, 리듬과 선율의 퍼즐, 그리고 독주 바이올린과 현악기들의 조화를 들으시길 권합니다.
대화의 시작에서 날씨는 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저는 심지어 날씨에게 점심 메뉴를 추천받아요. 쌀쌀하면 국물이 떠오르고 후덥지근하면 샐러드나 냉면이죠. 기후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 현상으로 더 이상 각 계절의 특징을 무 자르듯 특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어요. 비발디가 ‘사계’에서 표현한 음악이 100년 뒤의 인류에겐 ‘거짓말 같은’ 음악이 되는 건 아닐지 우려되는데요. 적당히 비도 오고, 적당히 햇살이 쏟아지는, 계절마다의 적당한 특징으로 그 변화에 대해 오래도록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비발디가 ‘사계’를 작곡한 지 30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뒤의 먼 미래에는 ‘옛날옛날 지구에 사계절이 있었는데, 특히 대한민국은 그 사계절의 변화가 매우 뚜렷했대’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질지 모르겠네요. 비발디가 그려낸 자연의 리듬대로 지구의 리듬을 오래도록 즐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비정상적인 날씨로 인간이 아프지 않도록, 그 간절한 마음으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빠의 핸드폰 통화 연결 음악이 바로 비발디의 ‘봄’의 1악장인데요. 문제는 사계절 내내 ‘봄’이 나온다는 거예요. 아빠는 모르고 계세요. 아빠 덕분에 사계절 내내 봄이 들린(봄을 듣는)다는 것을.
안인모 피아니스트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