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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장경식(왼쪽)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강원사무소 소장(류희림 위원장 민원사주 의혹 당시 종편보도채널팀장)이 지난달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
17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장이 ‘민원 사주’ 의혹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받게됐다.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이 사건(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을 이첩받은 감사원은 류 위원장을 감사할 예정이다. 2023년 12월, 처음 이 의혹이 제기됐을 때부터 사안은 명료했다. 류 위원장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을 동원해 ‘뉴스타파의 김만배 녹취록을 인용 보도한 방송사들을 심의해달라’는 민원을 방심위에 넣었다는 게 골자다. 민원인 수십 명이 류 위원장의 가족과 과거 직장 동료라는 게 드러났다. 이들이 낸 민원은 오타까지 똑같았다.
방심위는 방송의 공정성 등을 심의한 후 방송사를 징계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민간독립기구다. 방심위는 ‘김만배 녹취록’을 인용 보도한 방송사에 역대 최대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징계가 류 위원장 가족과 지인들의 민원으로 촉발된 것이라면, 조직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다. 지인들 명의로 수십 건의 민원을 넣었던 방심위 팀장이 2018년 파면된 건 그래서다.
하지만 류 위원장은 지난 17개월 동안 권익위의 비호 아래 무탈하게 지냈다. 심지어 지난해 7월에는 온갖 의혹에도 또다시 방심위원에 위촉됐고, 위원장 자리도 연임하게 됐다. 그사이 권익위는 지지부진 시간을 끌다 사건을 방심위로 넘겨 ‘셀프 조사’ 하도록 했고, 지난 2월에는 “(류 위원장의)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결론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류 위원장을 위한 완벽한 면죄부였다.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을 다시 되살려 낸 건 방심위 간부의 양심고백이었다. 장경식 전 종편보도채널팀장은 지난달 국회에서 ‘류 위원장 동생의 민원 제기 사실을 류 위원장에게 보고했다’고 폭로했다. “보고받은 적 없다”던 류 위원장의 거짓말이 들통나자 권익위 재조사, 감사원 감사로 이어지고 있다.
당초 류 위원장에게 관련 보고를 한 적이 없다던 장 전 팀장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나는 류 위원장에 맞서 묵묵히 싸워 온 방심위 직원들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이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며 민원사주 의혹을 제기한 내부고발인 색출에 나섰을 때, 방심위 직원 80%가 실명으로 류 위원장을 권익위에 공동 신고하며 연대했다. 인사 불이익 등 숱한 부침에도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장 전 팀장은 국회에서 “(거짓 증언으로) 양심의 가책과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말했다. 상식과 양심, 직업 윤리로 일터를 지키려는 동료들을 보며 장 전 팀장은 괴로웠을 것이고, 동시에 거짓을 바로잡을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방심위 직원들과 장 전 팀장은 서로가 서로를 살렸다. 그리고 방심위를 지켜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