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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이끈 유튜브… 독재 정권 무기로 전락

조선일보 서보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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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이끈 유튜브… 독재 정권 무기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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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은마아파트 내 공사현장에서 작업자 3명 매몰
[유튜브 20년] [1]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이집트 카이로에 사는 압달라 나세프(24)씨는 열 살 때인 2011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아랍의 봄(아랍권 민주화 운동)‘을 목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와 30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민주화 혁명을 인파 가운데서 보았다. 나세프씨는 21일 본지에 “당시 사람들의 손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어른들은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보며 움직였다”고 기억했다. 이들 소셜미디어는 독재 아래 숨죽여 살았던 사람들을 광장으로 끌어냈고 무바라크를 결국 자리에서 몰아냈다.

스마트폰 통해 퍼진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아랍권 민주화 운동)'이 이어지던 2011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여성이 스마트폰을 들고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당시 억눌린 개인의 목소리를 전하며 주목받았던 소셜미디어는 최근 정치 권력의 선전 도구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스마트폰 통해 퍼진 '아랍의 봄' - '아랍의 봄(아랍권 민주화 운동)'이 이어지던 2011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여성이 스마트폰을 들고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당시 억눌린 개인의 목소리를 전하며 주목받았던 소셜미디어는 최근 정치 권력의 선전 도구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이집트는 권위주의적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태다. 당시 ‘아랍의 봄‘에 동참했던 다른 국가들 중에도 그토록 열망한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한 국가를 찾기 어렵다. 한때 민주 시위의 구심점이던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는 많은 경우 권위주의 정권이 프로파간다를 심는 데 악용되거나 반정부 인사에 대한 검열·추적을 돕는 도구로 변질됐다. 열 살 때 강렬한 기억으로 팟캐스팅 진행자가 됐다는 나세프씨는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적 도구가 됐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도 검열을 두려워하며 방송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는 23일 세계 최대 동영상 소셜미디어인 유튜브가 첫 동영상을 공개한 지 20년을 맞는다. 세계 100여 국 사람들이 하루 10억 시간 이상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출범 초기 다양한 개인의 목소리에 큰 힘을 부여해줄 자유민주주의의 든든한 우군(友軍)이 되어 주리란 기대를 모았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는 지난 20년 사이 빅테크 기업의 ‘돈 버는 알고리즘‘으로 굳어지면서 기대와 달리 사회 분열을 고착화시키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정권 비판 올리면 체포… 감시 도구 돼도 유튜브는 방관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이후 이집트·리비아·예멘·시리아 등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 국가로 확산했다. 이집트의 경우 2011년 1월 17일, 26세 여성 아스마 마흐푸즈가 유튜브에 올린 4분 30초 길이의 영상이 여러 소셜미디어로 전파되며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우리가 이 땅에서 존엄하게 살고 싶다면 25일 광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정부는 부패했습니다. 각자 다섯 명, 아니 열 명씩 데리고 타흐리르 광장에 모입시다!” 지금 보면 화질도 나쁘고 자막도 없는 조악한 영상이지만, 순진해 보이는 젊은 여성의 열정적 호소가 전파되면서 한 주 뒤 타흐리르 광장에 3만명이 모이게 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소셜미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런 모습에 감동해 2021년 정치 팟캐스트를 설립했다는 나세프씨는 “소셜미디어는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도구였지만, 지금은 정치적 격변을 억누르는 감시의 도구가 됐다. 지금 이집트 정치범 대부분은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표출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된다”고 했다.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글을 추적해 구속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다양한 목소리는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나세프씨는 말했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축출 후 민주적 선거로 2012년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선출했지만, 이듬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압델 파타 엘시시가 정권을 잡은 후 지금까지 10년 넘게 집권 중이다.

문제는 권위주의 정부가 소셜미디어의 작동 방식을 학습해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엘시시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해 임기를 늘린 2019년 소셜미디어에서 일어난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유튜브 등엔 엘시시를 규탄하는 콘텐츠가 많이 올라왔다. ‘아랍의 봄‘으로 간신히 손에 넣은 자유민주주의를 영영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했다. 그러자 ‘불법 게시물‘로 신고됐다며, 인권 운동가나 언론인 등 반정부 목소리를 내는 계정이 무더기로 정지되기 시작했다. 후일 조사 결과 이는 이집트 정부가 동원한 유령 계정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반정부 콘텐츠를 대거 신고하면서 생긴 일로 밝혀졌다.


이들 유령 계정은 역으로 ‘우리는 시시(엘시시의 애칭)를 원한다‘, ‘내 대통령은 엘시시’ 같은 내용의 영상과 글을 대거 유포했다. “반정부 시위에 나온 사람들이 스파이”라거나, “반정부 성향 유튜브에 올라 있는 시위 영상이 허위”라는 내용의 영상들도 그럴싸한 설명과 함께 널리 퍼졌다. 팔로어 100만명이 넘는 인플루언서(유명인)를 정부가 포섭해 ‘반정부 언론의 배후에 영국 첩보 기관이 있다’ 같은 허위 정보를 퍼뜨리기도 했다. 엘시시는 결국 개헌을 통해 2030년까지 집권할 길을 열었다. 튀니지의 인권 운동가 사미 벤 가르비아는 “많은 나라의 정권은 소셜미디어 사용법을 우리(민주화 시위대)에게서 배웠고, 이젠 우리를 공격하는 데 이를 사용하고 있다. 유튜브도 이를 방치한다”고 했다.

유튜브를 혁명의 지렛대로 삼았던 ‘아랍의 봄’ 당시 민주화 운동가 중 다수는 소셜미디어의 변질에 실망해 일찌감치 등을 돌렸다. 경찰 고문으로 사망한 희생자를 추모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개설을 주도해 이집트 혁명의 상징이 됐던 와엘 고님(45)은 “우리를 하나로 묶었던 도구가 결국 우리를 갈라 놓았다”는 말을 남기고, 현재 소셜미디어 활동을 접은 상태다. ‘아랍의 봄‘을 계기로 국왕이 총리 선출권을 국민에게 넘긴 모로코 출신 자이드 무스타파 벨바기(36·컨설턴트)씨는 본지에 “‘아랍의 봄‘은 국영 미디어가 양산하는 뉴스만 접하던 중동의 시민들에게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매체를 경험하게 한 흥미로운 시기였지만 그 동력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며 “권위주의 정권 자체가 소셜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고 이를 악용하면서 유튜브 등에 대한 환상도 깨진 상태”라고 했다.

벨바기씨는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등이 (대립 중인) 이란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카타르를 비방하는 광범위한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벌인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그는 “하룻밤 사이 카타르에 대해 독설과 비방이 엄청난 속도로 전파됐다. 이 같은 증오의 빠른 확산은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기 전엔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일방적 비방이 아무 통제도 없이 퍼져 나가는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소셜미디어가 인공지능(AI)과 결합하고 정권이 이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고 했다.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의 한 과일 행상이 경찰 단속에 반발해 분신한 일을 계기로 중동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反)독재 민주화 운동. 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에서 정권 교체를 이뤄냈지만, 대부분 국가가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지며 전반적으로 실패한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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