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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전용 숙소도 마다한 교황... 소수자·난민 보듬고 떠났다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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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럽 출신 첫 교황
축구·탱고에 열광
21일 오전 선종(善終)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으로서 2013년 취임 이후 12년간 교황청의 기득권을 개혁하고 가톨릭 교회에서 소외받았던 소수자를 챙기기 위해 애썼다. 취임 초엔 ‘수퍼스타’로도 불렸다. 초등학생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강론, 항상 미소 짓는 ‘2중턱 할아버지’로 대중에게 친근한 교황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AF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AFP 연합뉴스


◇축구·탱고광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아 베르고글리오. 청년 시절 교황은 여느 아르헨티나 청년들처럼 축구와 탱고에 열광했다. 연정(戀情)을 품었던 여성이 있었다고 밝힌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제로 진로를 결정하고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아르헨티나 최대 교구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재직하다 교황에 선출됐다. 그는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에 선출된 2005년 콘클라베에서도 유력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2013년 베네딕토 16세가 생전에 교황직을 사임하면서 열린 콘클라베에 참석할 때에는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한다. 자신이 선출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그가 속한 예수회는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항해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동시에 가톨릭 개혁과 신대륙과 아시아 등에 대한 전교(傳敎)에 앞장선 수도회다. 영화 ‘미션’에도 등장하는 수도회다. 예수회는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여 국내에도 서강대학교를 설립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다.

그래픽=정인성

그래픽=정인성


교황은 선출 직후 자신의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했다. 이 또한 최초이다. 그동안 바오로, 요한, 베네딕토 등 성인의 이름을 딴 교황은 많았다. 전임 베네딕토 교황은 ‘16세’였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을 연 교황은 ‘요한 23세’이다. 프란치스코(1182~1226)는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성인으로 ‘빈자(貧者)의 성자’로 불린다. 2013년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콘클라베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자 브라질 출신 무메스 추기경이 그를 포옹하며 “가난한 이를 잊지 마세요”라고 당부한 데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연중 제33주일(11월 중순)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선포해 매년 전 세계 가톨릭이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AP 연합뉴스


◇소탈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떤 교황보다 소탈했다. 역대 교황은 취임하면서 복장부터 바뀌었다. 추기경의 상징 색깔이 순교를 상징하는 진홍색이라면 교황은 흰색이다. 신발은 붉은색이 원칙이었고, 가슴 십자가도 바꾸곤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시절부터 쓰던 가슴 십자가와 검정색 구두를 그대로 착용했다. 또한 교황청 내의 전용 숙소를 마다하고 베네딕토 16세 선종 후 새 교황 선출을 위해 로마를 찾았을 때 묵었던 방문객 숙소인 ‘마르타의 집’에서 지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0년 7월 마피아 내부 고발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팔리아노 교도소를 방문, 재소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주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부활절을 사흘 앞둔 성(聖) 목요일에 진행되는 이번 의식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의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0년 7월 마피아 내부 고발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팔리아노 교도소를 방문, 재소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주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부활절을 사흘 앞둔 성(聖) 목요일에 진행되는 이번 의식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의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AP 연합뉴스


“여보세요. 교황입니다”라는 전화를 받았다는 일화는 숱하다. 교황청 교환원부터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던 학생까지 수행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교황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취임 후 첫 미사에 바티칸 청소부를 초대하고 부활절에는 무슬림 여성의 발을 씻어줬다. 미사 중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가 연단 위를 뛰어다녀도 미소만 지었다. 이런 점 때문에 취임 첫 해에 시사 주간지 ‘타임’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수퍼스타 교황’이란 말도 나왔다. 침체된 가톨릭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은 교황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교황에 대해 ‘붉은 교황’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일(현지시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로힝야 난민 소녀를 만나고 있다. 교황은 이날 로힝야 난민 16명을 한 명씩 만나 얘기를 듣다 한 소녀에게는 손을 얹어 축성한 후 이들이 겪은 상처와 세계의 무관심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AP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1일(현지시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로힝야 난민 소녀를 만나고 있다. 교황은 이날 로힝야 난민 16명을 한 명씩 만나 얘기를 듣다 한 소녀에게는 손을 얹어 축성한 후 이들이 겪은 상처와 세계의 무관심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AP 연합뉴스


◇소수자에 대한 애정

요한 바오로 2세 이전 교황청 주변엔 ‘교황이 된다는 것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과거 가톨릭 교회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몸소 언행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수정했다.

교황은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혼모의 자녀, 동성애자 등을 교회가 품는 일에 긍정적이었다. 특히 이민자 가정 출신답게 이민자와 난민 문제에 대해서는 포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교황 취임 후 첫 방문지는 북아프리카에서 난민들이 지중해를 건너와 밀입국하는 항구인 이탈리아 남부 람페두사였다. 교황은 “재정적 부패도 문제이지만 마음의 부패도 문제” “무관심의 세계화가 큰 문제”라고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성 사제 서품, 동성혼 허용 등 가톨릭의 주요 교리에 대해서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교황청의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을 발표한 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산 조스 성당에서 한 교구민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그림을 어루만지고 있다./AP 연합뉴스

교황청의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을 발표한 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산 조스 성당에서 한 교구민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그림을 어루만지고 있다./AP 연합뉴스


◇내부 개혁엔 적극적

교황청 개혁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주요 대상은 재정·회계 분야였다. 취임 직후부터 교황청 재정을 외부에 회계 감사를 맡겼던 그는 2021년엔 로마 교구도 회계 감사를 하는 등 재정 투명화에 앞장섰다. 교황청의 재정과 주식·부동산 투자 등 재정에 관해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황청 기득권과 충돌을 빚었고, 교황이 임명한 책임자들이 잇따라 사퇴하기도 했다. 마피아도 파문했다. 취임 이듬해인 2014년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를 방문한 교황은 마피아 조직인 은드란게타에 대해 “악을 숭배하고 공동의 이익을 경시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파문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내내 마피아 암살 기도설에 시달렸다.


그동안 가톨릭에서 비주류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취임 이듬해인 2014년 한국을 방문했으며 한국 출신 유흥식 추기경을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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