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0 퀵 배달원 동행해보니
![]() |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에서 실버 택배원 최영식씨가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있다. 이날 최씨는 청계산 화훼단지에서 개원 축하 선물인 대나무 화분을 받아 서울 성동구의 한 개인 병원에 배달했다. 최씨는 “사람이 좋아서 일을 안 할 수가 없다”며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낙이고, 지하철에서 사람 구경하며 살맛 난다”고 했다./장련성 기자 |
“어디로 가져다 드릴까요? 알겠습니다. 다음 타자 출발!”
15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예관동의 ‘실버 퀵(택배)’ 사무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사장 배기근(76)씨가 ‘실버 택배’라고 적은 흰색 종이를 집어 들었다. 배달 물품은 전통 자수 용품. 경기 부천에서 서울 동대문까지 33km를 날라야 한다. 배씨가 “직전 접수한 것까지 배달 두 건을 한 번에 할 수 있네. 땡 잡았다”고 하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던 60~70대 어르신 다섯 명이 앞다퉈 “내가 가겠다”고 했다. 사무실 문에는 ‘장수의 비결. 늙으면 미움 살 소리, 헐뜯는 소리와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게 하소’라고 적은 종이가 붙어있었다.
하루에 2만~3만보를 걸으면서 일하는 어르신들이 있다. 대중교통을 타고 도보로 택배품을 나르는 ‘실버 택배원’이다. 은행 서류나 인감도장, 명품 의류·가방, 유골함까지 온갖 물품을 배달하느라 도심 곳곳을 누빈다. 도마뱀 같은 반려 동물을 배송하거나 초등학생들을 하교시키는 일도 도맡는다. 사장 배씨는 “영정 사진이나 유골함 의뢰가 들어오면 직원들이 숙연해진다”며 “다른 물품보다 더 꽁꽁 싸매서 배송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들의 주 일터는 지하철. 65세 이상은 지하철을 탈 때 요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배달료는 1시간 이내면 1만2000원, 인천·경기 등 수도권은 2만~3만원이다. 충남·강원 지역도 3만~5만원 주면 달려간다. 오토바이 퀵서비스(20km 기준 약 2만5000원)의 절반 수준이다.
![]() |
그래픽=김현국 |
‘실버 퀵’ 사무실엔 하루 평균 60~80건 의뢰가 들어온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 14~18일 닷새간 실버 택배원 6명과 배달에 동행했다. 이들과 함께 지하철·도보로 이동한 거리는 총 580km다. 15일 오전 9시 30분, 최모(72)씨에게 ‘왕복 일감’이 배당됐다. 물건을 배달한 뒤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고 한 번에 두 가지를 배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11시까지 가보겠습니다.” 고객과 통화를 마친 최씨가 교통 정보 앱 2~3종을 번갈아 보더니 을지로4가역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키 161cm에 57kg으로 군살 하나 없는 최씨 걸음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는 “동선을 철저히 계획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도착 시각이 늦어진다”며 “맨 오른쪽 지하철 칸에 타면 제일 빠르다”고 했다.
최씨는 역무원, 지하철 기관사로 31년을 서울 지하철 역사에서 일한 뒤 14년 전 퇴직했다. 10년 전 ‘삼식이’가 될 수 없다며 택배 일을 시작했다. 한 달에 들어오는 수익은 60만~80만원. 점심 값 등으로 나가는 돈을 빼면 남는 건 40만원 정도다.
사무실로 복귀했더니 ‘콜’을 기다리던 어르신 네 명이 신문을 읽거나 믹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모(75·경기 남양주)씨의 별명은 ‘연중무휴’다. 휴무도 없이 매일 사무실에 발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정모(65·서울 강동구)씨는 노래 강사로 일하다가 코로나 사태로 직업을 잃었다. 먹고살기가 막막한데 일감이 없어 우울증을 앓았다. 그런데 ‘실버 퀵’ 일을 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 |
![]() |
그래픽=김현국 |
“충남 아산까지 ‘은행 전장표’ 배달이요!” 조사웅(79)씨가 사무실을 나서자 남은 어르신들이 “박사 잘 다녀와”라고 했다. 7년 차 베테랑이라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서울서 충남까지 가는 장거리 퀵 비용은 3만5000원이다. 이 중 1만500원(30%)은 회사가, 나머지는 조씨가 가져간다. 화학 회사에서 40여 년 일하다가 IMF 때 실직했다. 조씨는 “근조기를 배송할 때는 특히 이동이 어렵다”며 “수도권 장례식장에 가려면 버스를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해 ‘차 좀 태워달라’고 부탁하는데 근조기를 보고 다들 거부한다”고 했다.
최근 65세 이상이 적용받는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커져 실버 택배원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버 퀵은 노임은 낮아도 지하철로 이동하면 비용이 사실상 제로(0)라 이윤을 남길 수 있는데, 지하철 비용을 내야 한다면 수익이 크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버 퀵 업체가 늘어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도 이들에게는 걱정이다.
“서둘러야 해요.” 16일 오전 9시 동행한 최모(73)씨는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 횡단보도를 내달렸다. 그는 “남들은 푼돈 벌려고 애쓴다 하지만 한 푼이 아쉽다”고 했다. 1년 1개월 경력의 최씨가 강동구 둔촌동에서 강남 도산공원까지 배달한 물품은 4kg짜리 무광 페인트통. 그는 가방에 항상 소보로·단팥빵을 챙겨 다닌다. 이북 피란민 출신인 최씨 어머니는 그가 돌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 젖도 못 먹고 자라서 그랬는지 평생 배가 고팠다”며 “끼니를 못 챙길 때가 많은데 늦더라도 식사는 꼭 하려고 한다”고 했다.
경기 부천에 사는 장명정(86)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서울 중구 사무실에 매일 6시 도착한다. 건설 회사에서 25년 근무한 장씨는 택배 일로 모은 돈으로 오는 7월 결혼하는 손녀 결혼식에 500만원을 보탰다고 했다. “60년 내내 꼬박 일하고 있지만 지치지 않습니다. 일 자체가 살아가는 의미거든요.”
[조민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