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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부 대신 ‘평화의 아이콘’으로… 이미지 바꾸는 아랍국가

조선일보 유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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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갈등 중재자로 우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7일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타밈 국왕은 이날 회담에서 푸틴에게 “시리아 새 정권이 러시아와 관계 구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고 알자지라가 보도했다. 러시아 내 중동 군사 거점 역할을 해온 시리아에서 지난해 12월 친러시아 성향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정부가 들어서면서 관계가 단절될까 노심초사해온 푸틴에게 시리아 정세를 귀띔해주며 걱정 말라고 다독여준 것이다.

두 정상의 회담 주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지지구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전쟁으로 옮겨갔을 때 푸틴은 “카타르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걸 안다”며 타밈 국왕을 치켜세워 줬다.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앞서 지난 12일에는 이란의 핵개발 포기 대가로 국제사회 제재를 풀어주는 핵합의(포괄적행동계획·JCPOA)를 7년 만에 복원하기 위한 미국과 이란의 첫 협상이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열렸다. 오만은 반세기 가까이 외교 관계가 단절돼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두 나라의 회동 장소를 제공하고 양측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며 협상을 물밑에서 이끌었다.

전쟁과 테러, 정변 등으로 세계 정세가 혼탁한 상황에서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이 잇따라 분쟁 당사국 사이 중재를 도맡고 있어 눈길을 끈다. 부유한 산유국이자 이슬람 왕정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는 이 나라들은 걸프협력회의(GCC)라는 기구를 꾸리고 협력해왔는데, 저마다 중재 외교에 뛰어들면서 역내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양상이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면서 발발해 3년 2개월째 진행되고 있는 전쟁 역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종전·정전 등의 중대 변곡점에 이를 가능성이 점쳐진다. 다음달 2기 취임 후 첫 방문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을 예정인 트럼프가 이곳으로 푸틴을 불러내 직접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갖겠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와 관련해 결정된 게 없다는 입장이지만, 푸틴과 사우디에서 톱다운식 협상을 벌이려는 트럼프 측의 끈질긴 요구에 응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이미 사우디 제2도시 제다에서는 지난 2월부터 미·러, 미·우크라이나 협상이 진행됐다. 막강한 오일 머니를 앞세워 국제사회에 정치·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총리 겸 왕세자가 국제분쟁 조정자로서 면모를 과시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라비아 국가들이 국제분쟁의 중재자로 적극 나선 것은 최근의 일은 아니다. 막대한 오일 머니로 부를 쌓았지만 지정학적 위협에 노출돼 있던 이 나라들은 미국 주도의 자유 진영과 소련 주도의 공산 진영이 패권을 다투던 냉전 시기부터 ‘어느 누구와 척을 지지 않는다’는 중립적 외교 노선을 추구했고, 이는 중재 외교의 기반이 됐다.

아라비아 중재 외교를 주도해온 나라는 오만과 카타르다. 오만은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파(사우디가 주축)·시아파(이란이 주축)도 아닌 제3의 종파 ‘이바디파’가 다수라는 특성 때문에 이슬람권 모든 나라와 관계가 원만하다는 점을 중재 역량에 충분히 활용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1990년대 사우디·이란 갈등 해소, 2015년 이란과 서방국가들의 JCPOA 타결 등 굵직한 사안에 적극 관여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카타르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리비아·차드·수단 등 아프리카 나라에서 내전이 터졌을 때 중재역을 도맡았다. 미국이 20년 동안 치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고 2021년 철군할 때도,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올해 1월 첫 번째 휴전에 도달할 때도 협상의 막후에는 카타르가 있었다.

다른 아라비아 국가들보다 개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랍에미리트(UAE)도 최근 중재자로서 역할이 눈에 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양측에서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여러 차례 포로 교환 협상을 이끌고 성사시켜 많은 나라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쿠웨이트는 GCC 내부적으로 위기가 닥쳤을 때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2017년에는 중동 외교 노선 등을 두고 갈등해온 사우디와 카타르가 전격 단교하며 GCC 와해 위기로 치닫자 쿠웨이트가 양측 중재에 나서 봉합시킨 바 있다. 이처럼 각국 간 중재 사례가 잇따르면서 역내 최대 국가인 사우디까지 중재 외교에 뛰어들어 당면 과제인 ‘러시아·우크라이나전 해결’에 힘을 쏟는 상황이 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기존 미국이 해왔던 ‘세계 질서 수호자’ 역할을 포기하면서 아라비아 국가들의 중재 외교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지금 이런 현상이 눈에 띄는 것은 전쟁을 하고 있던 다수 국가의 상황이 종전 국면에 들어선 것과 동시에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영향이 크다”며 “트럼프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어디서든 딜(거래)을 만들어 내려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재국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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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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